대동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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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 감악산 정상에 있는 비석. 비스듬히 서 있어 ‘삣뚤대왕비’라고 불렸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빗돌대왕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설인귀(薛仁貴)를 기리기 위한 사적비라고도 한다. 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라고도 하나 이는 와전인 듯하다. 글자가 잘 보이지 않으므로 몰자비(沒字碑)라고도 한다. 비가 감악산 정상에 서게 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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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황방리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던 마을 제사. 감악산 산제사는 신암리에서는 매년 음력 9월초, 황방리에서는 매년 10월 초에 감악산 정상에서 감악산 산신에게 마을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던 제사이다. 감악산은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황방리, 파주시 적성면, 연천군 전곡읍에 걸쳐 있는데, 이 일대 주민들이 감악산 산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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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감악산에 있는 신라 시대의 사당 터. 감악산사(紺岳山祠)는 감악사(紺嶽祠)라고도 불리며, 삼국 시대부터 사당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해동지도(海東地圖)』[1760]에는 “감악산 정상에 사당이 있는데 감악산 산신에게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중기에 거란이 침입해 왔을 때 신령스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하여 국가적인 제사와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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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에 속하는 법정리. 광석리(廣石里)라는 땅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곳의 밭 1,000여 평에 돌이 한 자[尺] 깊이로 깔려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과, 마을에 넓은 들이 있어 넓은들·나븐들이라 부르던 것이 ‘너븐’과 ‘너븐돌’과 ‘넓은돌’을 거쳐 ‘광석(廣石)’이라는 한자어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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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에 속하는 법정리. 광석리(廣石里)라는 땅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곳의 밭 1,000여 평에 돌이 한 자[尺] 깊이로 깔려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과, 마을에 넓은 들이 있어 넓은들·나븐들이라 부르던 것이 ‘너븐’과 ‘너븐돌’과 ‘넓은돌’을 거쳐 ‘광석(廣石)’이라는 한자어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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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에 속하는 행정면이자 법정면. 광적면(廣積面)은 광석면(廣石面)에서 ‘광’자와 석적면(石積面)에서 ‘적’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광석면이라는 이름은 현재의 광석리에 펼쳐져 있는 넓은 들판에서 비롯되었다. 즉, 넓은 들판을 의미하는 ‘너븐달’이 ‘너븐돌’로 읽히고 이것이 한자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광석(廣石)’이 되었다. 석적면도 들판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즉,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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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부터 조선 시대까지 경기도 양주에 설치되었던 교통·통신 기관. 역(驛)은 고려와 조선 시대 주요 도로에 일정한 거리마다 설치되어 교통 통신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역참(驛站)이라고도 불렀다. 노원역은 청파역과 함께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함경도 지방을 연결하는 첫 번째 역으로 청파역과 함께 병조에서 관리하였다. 노원역은 다른 지역의 역들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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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와 덕계동, 은현면 도하리·용암리, 광적면 석우리·가납리 등지에 걸쳐 있는 산. 도락산(道樂山)은 두락산(頭落山), 돌압산(突壓山), 돌압산(突押山), 돌앞산, 노락산으로도 불리었다. 이처럼 여러 이름으로 불린 배경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모든 산들이 서울 남산을 향해 가는데 불곡산이 가로막고 길을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나서 덕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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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고구려의 군. 본래 지금의 양주시 일대는 고구려에 속하였다가 백제 근초고왕이 취한 이후 백제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다시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다시 고구려 군현이 되었다. 특히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7 지리지에서는 매성군이라 칭하고 있으나 같은 지역을 놓고 『삼국사기』 권35 지리2 신라 한주 내소군조 및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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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부터 조선까지 경기도 양주에 속했던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던 나루. 진(津)[나루]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주요 수상 교통로에 설치한 교통·통신 기관의 하나로서, 강을 오가는 사람과 물자를 통제·관리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미호진(渼湖津)은 현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를 지나 팔당과 미사리를 거쳐 왕숙천(王宿川)이 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인 강동대교 직전에 있었다. 미호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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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행정읍이자 법정읍. ‘백석(白石)’이라는 땅 이름은 백석읍 방성리와 양주읍 유양리·어둔리에 걸쳐 있는 양주산성[구 양주 대모산성]에 흰 돌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양주산성에는 흰 돌이 없고, 다만 방성리에 소재한 양주소놀이굿전수회관 부근의 배나무 과수원에 흰 돌이 있어 이를 ‘백석’의 기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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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어둔동과 백석읍 방성리 양주 대모산성에 걸쳐 있었던 자연 마을. 양주산성[양주 대모산성]이 있어서 원래 산성 또는 산성마을이라고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산성동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일제 초기의 문헌에서부터 확인된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서는 이 지역을 산성리(山城里)로 소개하였다. 산성의 일부는 지금까지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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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있던 산. 또는 그 산이 있던 자연 마을. 서산(西山)은 조선 시대에 한양[서울]에서 볼 때 서북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부곡리를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는 일영봉·제일봉·종래봉·매봉 등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산을 가리키는 것인지, 네 개의 산 전체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서산은 서산골짜기라고도 불렀으며, 장흥면 전체를 가리키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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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부터 근대까지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일대에서 열렸던 정기 시장. 신천장(莘川場)은 양주를 관통하는 신천(莘川)에서 유래되었다. 신천은 양주군 남면 신산리(莘山里)에서 발원하여 남행하다가 회천에서 ㄱ자 형으로 돌아 북쪽으로 흘러가다 동두천 시내를 관통하여 한탄강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본래 동두천 지역의 신천은 삼국 시대부터 모래내, 즉 사천(沙川)으로 불렸고 현재의 정식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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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7년 동안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전쟁을 가리킨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를 포함시켜 말한다. 우리 민족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던 임진왜란이라 하면, 단연 이순신(李舜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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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경기도 양주 지역의 주요 수상 교통로에 설치된 나루. 고려와 조선 시대 때 국가에서는 주요 교통로 상의 강변 요충지에 진(津) 또는 도(渡)를 설치하여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검색하거나 여기에 배치된 진도선(津渡船)[나룻배]을 이용하여 국가의 명령 전달, 사람과 물자 수송 등 교통과 통신 기능을 담당하게 하였다. 진의 관리와 운영을 위해 고려 시대에는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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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봉양동과 동두천시 탑동동·송내동, 포천시 설운동에 걸쳐 있는 산. 양주시 봉양동의 내촌동 뒷산에서 보면 일곱 봉우리가 뚜렷하게 보인다 해서 칠봉산(七峰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특히 10~11월이면 단풍나무 사이로 기암괴석이 펼쳐진 모습이 한 폭의 비단 병풍과 같다고 하여 금병산(錦屛山)으로도 불렀다. 조선 시대에는 어등산(於等山) 또는 어등산(於登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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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회천4동에 속하는 법정동. 회암동(檜岩洞)의 옛 이름인 회암리의 땅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옛 회암면 지역에 회암사(檜巖寺)가 있어 회암골·회암동·회암으로 불렸다는 설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문헌에 따르면 ‘회암’이라는 땅 이름은 회암사라는 사찰의 이름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회암사의 창건 시기가 분명하지 않아 연대를 확정하기 힘들다. 다만 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