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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011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양주시
집필자 이도남

[개설]

경기도 양주는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치열한 쟁탈전의 현장으로서, 고려 시대에는 개성과 조선 시대에는 한양과 가까운 근기(近畿) 지방에 속함으로써 수많은 부침(浮沈)을 겪어 왔다. 그리고 그 수많은 부침 속에는 역사에 오롯이 이름 한 줄로 남았거나 혹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사람들의 삶과 사연들이 녹아 있다. 경기도 양주 지역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 중요한 사건과 내용을 살펴보고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와 앞으로 더 오랫동안 우리의 후세들이 살아갈 양주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양주, 백제의 땅에서 시작되다]

삼국 시대 현재의 양주 지역에 제일 먼저 첫발을 디딘 나라는 백제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 의하면 132년(개루왕 5)에 북한산성을 쌓았고, 469년(고이왕 15)에 북한산성에 병사를 주둔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양주 땅에 백제인들이 들어와 성곽을 쌓고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면서 처음으로 큰 도시를 만들어 살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양주 땅을 바꾼 첫 번째 사건이었다.

[백제 영토에서 고구려 땅으로 넘어가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실시하면서 백제의 영토였던 양주 땅을 침략해 들어왔다. 그 결과 백제 땅이었던 양주는 고구려의 영토로 바뀌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현재의 양주시, 의정부시, 구리시, 남양주시, 서울 동북부 지역을 매성(買城) 혹은 마홀(馬忽)로, 동두천시 일대를 내을매(內乙買) 혹은 내이미(內爾米)라고 불렀다. 천보산맥과 불곡산·도락산 일대에 산재하는 고구려의 군사용 보루 유적들은 고구려 영토로 편입된 이 지역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매초성에서 당나라의 야욕을 꺾다]

삼국 통일 과정에서 신라는 당나라의 도움을 받아 백제와 고구려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신라까지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야욕을 갖고 신라와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 20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로 진격한 당나라 장수 이근행(李謹行)의 부대는 매초성에 주둔하였는데, 바로 이곳이 지금의 양주 땅이다. 신라는 게릴라 전술을 통해 이근행의 20만 대군을 물리쳤는데, 당나라의 야욕을 꺾은 매초성 전투의 현장이 바로 양주 땅인 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 양주의 땅 이름이 변하다]

통일 신라 시대인 757년(경덕왕 16) 매성은 내소현(來蘇縣)으로, 내을매는 사천현(沙川縣)으로 이름이 바뀐다. 경덕왕은 신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제도를 모두 당나라의 것으로 바꾼 임금이다. 따라서 우리 고유의 땅 이름을 당나라식 제도에 맞추기 위해 모두 한자식으로 바꾸어 버렸다. 양주의 원래 이름으로 물골을 뜻하는 우리말 ‘매성’에서 힌트를 얻어 물이 깊은 곳을 뜻하는 ‘소’라는 글자를 그대로 한자로 표현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궁예, 왕건을 시켜 양주를 치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弓裔)는 898년(신라 효공왕 2) 송악성[지금의 개성]을 수리하고 난 뒤 당시 정기대감이었던 왕건(王建)을 시켜 양주와 견주(見州)를 공격하였다. 후백제 견훤(甄萱)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양주와 견주 지역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한강의 물길이 통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물길에 익숙하고 지혜가 뛰어난 휘하의 장수였던 왕건을 파견하여 양주와 견주를 쳤던 것이다.

[왕건, 견훤에게 양주를 식읍으로 하사하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집권 후반기에 왕위 계승 문제 때문에 자신의 친아들인 신검(神劍)의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금산사에 유폐되었던 견훤은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후 신검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었던 고려의 왕건에게 투항하는 정치적 모험을 실행에 옮긴다. 자신에게 투항한 견훤을 맞이한 왕건은 누구보다도 견훤을 극진히 대접하면서 양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한다. 물론 이 때 양주는 지금의 서울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지만 지금의 양주까지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 양주의 이름은 견주였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후백제와 신라를 멸망시킨 후 지방 제도를 정비한다. 이 과정에서 태조 왕건은 예전에 한양군이라 불렀던 곳을 양주군으로 개칭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양주군은 지금의 서울이다. 고려 시대에는 지금의 양주 지역을 항상 견주라고 부르고 있었다. 고려 현종 때 기록을 보면 견주사천현, 그리고 풍양현(豊壤縣)[지금의 남양주시 진건읍·진접읍 일원]은 양주군[지금의 서울]의 속현이었다.

[조선의 창건 과정에서 양주 땅 이름이 정착되다]

조선 왕조를 창건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1395년(태조 4) 6월 6일[음력 6월 23일] 새로운 도읍지로 선정한 한양부를 한성부라 하고, 기존의 아전과 백성들을 견주, 즉 지금의 양주시 고읍동 일대로 옮기고 행정 구역 명칭을 양주군으로 고쳤다. 드디어 역사적 지역 명칭인 양주와 현재의 양주시가 일치하는 일이 이때 이루어지게 되었다. 양주 역사의 일대 전환점을 맞이했던 것은 바로 태조의 천도(遷都) 결과였던 것이다.

[세조, 양주목으로 승격시키다]

고려 시대 견주양주군으로 변화된 후 양주군은 다시 1397(태조 6) 양주부로 승격된다. 이후 1413년(태종 13) 수도 한성부를 보좌하는 기보(畿輔) 지역으로서의 특성을 감안하여 양주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다시 1466년(세조 12) 중요 지방 행정 구역 중에 전국적으로 12곳 밖에 없는 목(牧)으로 승격된다. 그만큼 조정에서 양주 지역을 수도 한양을 보호하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점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연산군, 양주를 없애버리다]

승격을 거듭하여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던 양주 지역은 불행하게도 1504년(연산군 10) 역사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된다. 연산군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기 북부 지역을 국왕의 무예 연마를 위한 공식 수렵장인 강무장(講武場)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금표비(禁標碑)를 세웠는데, 지금의 양주시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금표비 안쪽에 놓이면서 행정 구역으로서의 양주목(楊州牧)은 역사 속으로 잠시 사라지게 된다.

[중종, 양주목을 부활시키다]

1506년(중종 1) 연산군의 폐악을 보다 못한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은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내치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맞이하여 왕위에 앉히니, 그가 바로 조선 왕조 제11대 임금인 중종이다. 중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연산군에 의해 자행된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는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반정 공신들은 그 중 하나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양주목을 부활하는 작업을 실시한다. 양주가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고읍동을 떠나 유양동 시대를 열다]

조선 왕조의 개창과 더불어 양주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곳은 고려 시대 견주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양주시 고읍동 지역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에 의해 자행된 양주목의 소멸과 더불어 양주의 중심지였던 고읍동도 관아와 각종 부속 시설물이 모두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중종반정과 함께 새로운 신도시를 물색하던 반정 공신들은 지금의 불곡산 자락에 위치한 유양동을 새로운 양주의 중심지로 선정하고 신도시를 만들게 되었다. 중종 때 새롭게 태어난 양주는 이제 유양동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회암사, 양주를 살찌우다]

회암사(檜巖寺)는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승려 지공(指空)이 고국인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실제로는 1378년(우왕 4) 지공의 제자 나옹(懶翁)회암사를 중건(重建)한 후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회암사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절이었다. 1472년(성종 3)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지시로 다시 한번 크게 절을 중창하였으며, 명종 때에는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진흥 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사찰로 거듭 태어났다.

[성소[왕릉]는 모두 양주에 마련되다]

조선 왕조는 왕이 붕어(崩御)하면 사방 40㎞[100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강을 건너지 않는 곳에 왕릉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양주를 비롯한 한양 북쪽의 몇몇 고을이었고, 그 중에서도 양주는 가장 우선적으로 왕릉이 조성되는 곳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하여, 세조의 광릉 등이 양주 땅에 마련되었던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양주 땅에 왕릉이 조성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양주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살 만한 땅이었다는 반증인 것이다.

[조선 전기 왕들, 양주에서 자주 사냥하다]

조선 시대 양주 땅은 수도 한성부와 가깝고, 산과 들판이 알맞게 펼쳐져 있어 왕실의 강무장으로 자주 활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서산(西山), 홍복산, 천보산, 묘적산, 녹양평, 풍양 등이었는데, 이곳은 모두 조선 시대 강무장, 즉 임금이 공식적으로 사냥하던 곳이었다. 성종 대에는 국왕이 계절에 따라 춘수(春蒐)[봄 사냥]·하묘(夏苗)[여름 사냥]·추선(秋獮)[가을 사냥]·동수(冬狩)[겨울 사냥]를 행하는데 농한기에 시행하여 백성의 피해를 제거한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조선 왕조 초기 임금들이 양주 땅에서 자주 강무를 하였는데, 태종은 11회, 세종은 36회, 단종은 5회, 세조는 26회, 성종은 21회, 연산군은 15회 등 자주 양주 땅으로 거동하였다.

[임꺽정의 고향은 양주였다]

명종 때 백성들을 핍박하던 관리들을 혼내주곤 하였던 임꺽정은 양주 땅에서 출생한 의적이었다. 그는 양주에서 갓바치로 생활하면서 온갖 사회 비리를 철저하게 경험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의적으로서의 활동을 벌이게 된다. 현재까지 양주 지역에서 임꺽정의 출생과 생활 근거지에 대한 설화가 구전되고 있다는 것은, 임꺽정 난의 주 활동 무대가 양주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양주의 지정학적 요소와 그의 활동 지역이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양의 외각인 양주목이 이들 도적 집단에게 물화의 유통 정보와 중앙 정부의 정보·동향 탐지, 장물 처리에서 필요한 통로 등의 확보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쉽게 유추될 수 있는 것이다.

[해유령에서 왜병을 크게 물리치다]

게너미고개[해유령]는 임진왜란 당시 육지 전투 최초의 승리 지역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다. 1592년(선조 25) 4월 부원수 신각(申恪)이 이끄는 부대가 한강으로부터 따라 달려온 이양원(李陽元)과 함께 양주에서 흩어진 군대를 수습하였다. 때마침 함경남도 병사 이혼(李渾)의 장병들이 와서 원조하니 드디어 군대를 합하여 진을 치게 되었다. 때마침 왜병을 만나 70여 명을 목 베었다. 그러나 이 승리의 소식이 조정에 보고되기 전에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한강 전투 패배의 책임은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한 신각에게 있다고 거짓으로 보고했다. 이에 해유령 전투에 이어 대탄(大灘)에서 왜군의 북진을 방어하던 신각은 억울하게 참형(斬刑)을 당했으며, 죽은 뒤에야 진실이 밝혀지고 해유령 전투에서의 공이 알려졌다.

[현종 때 또 다른 위기를 넘기다]

1670년(현종 11) 양주에서 커다란 사건이 터진다. 양주 땅에 살던 애상(愛相)이란 여자가 남편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 애상은 남편을 죽인 일이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이에 격분한 조정과 왕실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진 양주목을 목(牧)에서 강등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양주가 대대로 능침(陵寢)이 있는 고을이라 하여 강등시키지 않고, 양주목사를 파직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이것은 조선 조정에서 양주를 얼마나 중요한 지역으로 취급하고 있었는지를 알려 주는 명확한 자료이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위험에 처하다]

조선 후기에는 일반적으로 회암사에 대한 관리는 소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일례로 1821년(순조 21) 7월 23일 광주의 유학(幼學) 이응준(李膺峻)이 회암사의 승탑[부도]과 비석을 파괴하고 사리를 훔친 후 그곳에 자신의 아버지를 묻은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두고 조정 대신들 간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다. 그러나 조선 왕조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승탑의 훼손 문제를 놓고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을 벌이다 이응준을 멀리 외딴섬에 유배시키고, 무학대사 등의 승탑을 원상회복시키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짓는다. 현재 회암사에 있는 지공, 나옹, 무학 등 3화상의 승탑은 1821년(순조 21) 경기 지방 승려들에 의해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고종, 지방 제도를 개편하다]

19세기 말에 들어 조선의 지방 행정 구역은 크게 변화되었다. 즉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따라 지방 제도 개정 사항이 전국에 반포되었다. 그 요지는 전국을 23부(府)로 나누되, 기존의 행정 구역명인 목(牧)-부(府)-군(郡)-현(縣)과 해당 지방관 명칭인 부윤(府尹)-목사(牧使)-부사(府使)-군수(郡守)-현령(縣令)을 모두 없애고, 고을의 명칭을 군(郡)으로, 해당 지방관을 군수(郡守)로 통일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전통적인 한국 사회의 기반이 해체됨을 의미했다. 당시 양주목은 경기 소속의 3등군(三等郡)인 양주군으로 변경되었다.

[양주, 세간살이 내주고 본가(本家)만 남다]

해방 이후 양주군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6·25 전쟁의 과정에서 양주 지역은 군사적으로나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군부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군부대 주변으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는 등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현재 5개 사단[25사단·26사단·28사단·65사단·72사단]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는 것은 이때부터의 변화 과정이다. 그런데 양주의 변화 중에서 현대사에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는 사실은 양주 지역이 본가인 현재의 양주시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세간살이 나가듯 분리되었다는 사실이다.

우선 1963년 의정부시가 분리되어 나가고, 지금의 노원구와 도봉구에 해당하는 노해면을 비롯한 양주 남쪽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들어갔다. 이어 1980년 남양주군이 분리되었고, 1981년에는 동두천시가 분리되어 나가면서 현재의 양주시 지역만이 남게 되었다. 세간살이 나간 모든 곳, 예를 들면 서울 동북부 지역과 남양주시, 구리시, 의정부시, 동두천시 등이 모두 현재의 양주시보다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자식들을 세간 내보낸 어버이가 초가삼간에 사는 우리네 정서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래도 본가는 역시 양주시임에는 틀림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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