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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업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422
한자 加業場
이칭/별칭 가래비장,추교장,가납장,갈업이장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지명/시설
지역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정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827년연표보기 - 가라비장으로 개설되어 3,8일에 장이 섬
변천 시기/일시 1842년연표보기 - 가업장으로 개명
변천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추교장으로 개명하고 5,10일장으로 변경
변천 시기/일시 일제 강점기 말기 - 가납장으로 개명하고 1,6일 장으로 변경
변천 시기/일시 2011년연표보기 - 가납장 4,9일장으로 변경
비정 지역 가업장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720지도보기
비정 지역 가업장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738-28지도보기
성격 고지명|시장
관련 문헌 『임원경제지』|『경기지』|『여도비지』|『경기읍지』|『조선의 시장경제』|『조선의 시장』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양주에서 개장하여 지금까지 열리는 5일장.

[명칭 유래]

가업리(加業里), 가납리(加納里), 추교리(楸橋里)는 모두 ‘가래비’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바꾼 것이다. 가래비는 ‘갈’에서 왔고, 이는 ‘갈림길’, ‘길이 갈라지는 곳’, ‘길이 나누어 두 갈래 길로 바뀌는 곳’, ‘삼거리’라는 뜻을 지닌다. 실제로 가래비양주 유양리 관아 거리에서 감악산 지역을 거쳐 파주로 나가는 길과 동두천, 은현 지역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 분기점이어서 이런 지명이 생겨났다. 따라서 가래비는 서울의 갈현동, 의정부의 추동(楸洞)과 같은 계통의 지명이라 하겠다. ‘추교(楸橋)’의 추(楸) 역시 ‘가래나무’라는 뜻으로 우리말 ‘갈’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채용된 것이다

[형성 및 변천]

가업장(加業場)이 처음 나타나는 문헌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로서 이 책은 1827년에 서유구(徐有榘)에 의하여 편찬되었다. 따라서 가업장은 적어도 1800년 중반 이전에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에 위치한 가래비는 한강 하구와 개성 지역을 출발하여 임진나루에서 임진강을 건넌 후 감악산, 도락산을 지나 불곡산, 사패산으로 이어지고 의정부를 거쳐 서울 광진나루까지 연결되는 하행길, 즉 장단로의 주요 길목으로 양주 서부의 물산이 모여드는 지점이었다. 따라서 양주의 농산물과 파주, 장단으로 오는 개성, 황해 남부 지역의 물산, 그리고 유양리의 양주 주내와 남방리로 이어지는 의정부 지역의 물산들이 가업장에서 교환되었다.

경기 북부의 큰 장이었던 가업장은 3, 8일장인 가라비장(加羅非場)에서 가업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원선 개통과 함께 양주의 행정적 무게 중심이 의정부로 옮겨 간 뒤에는 가래비의 한자어인 추교장(楸橋場)이라는 명칭의 장이 5, 10일에 섰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현재의 명칭인 가납장(加納場)이라는 명칭의 1, 6일장으로 바뀌었다. 현재 명칭은 그대로 가납장인 채 장날만 4, 9일로 바뀌어 유지되고 있다.

가업장은 본래 지금 자리가 아닌 가납1리 주유소 자리에서 열리다가 1940년대에 이르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가업장은 곡물의 거래가 성하였고 특히 양주의 특산물인 밤의 거래가 볼 만하였다고 한다. 곡물의 거래가 활성화되다 보니 장터에서 거래되는 곡물의 가격을 결정하고 곡물의 거래량을 계측하는 선출제 말감고가 4인이나 있었고, 곡식 시장과는 별도로 우시장이 형성되어 장날이면 평균 300두 정도의 소가 거래되기도 하였다.

가업장과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사건은 이곳이 바로 가래비 3·1 만세 운동의 현장이라는 점이다. 1919년 3월 18일 장날 가업장에 모인 1,500여 명의 양주 군민들은 마침 전국적으로 번져가던 3·1 운동에 합세하여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되찾는 일에 모두 동참하기로 하고 일제의 강점과 폭압에 저항하는 대규모의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다.

일제는 만세 시위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하여, 시위를 주도하던 백남식(白南式), 이용화(李龍和), 김진성(金辰成)이 순국하고 선열 4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양주 군민들은 다시 4월 3일 장날에 가업장에서 1,400여 명이 참여하는 2차 만세 시위를 전개하게 된다. 가업장날 장터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독립 시위를 가래비 3·1 만세 운동이라고 하며, 이 시위는 경기 북부에서 일어난 항쟁 중 최대 규모였다.

현재 해마다 3·1절이 되면 1919년 당시의 가래비 3·1 만세 운동을 재현하는 행사와 기념식을 거행하여 당시 애국선열들의 민족정신을 추념하고 있다. 일제는 양주와 같은 큰 규모의 전통 도시를 해체하여 일제의 강압 통치에 편리한 새로운 행정 체제를 갖추고자 하였다. 따라서 양주 지역을 관통하는 경원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고의적으로 기차 정거장을 양주 읍치가 아닌 의정부와 동두천에 설치하였다.

동시에 육로인 신작로 역시 읍치를 벗어나 동두천, 덕계, 의정부를 잇는 옛 삼방로 상에 개설하였다. 이처럼 교통로가 변경되면서 교통로의 중심축에서 제외된 양주는 행정, 경제, 교육의 핵심 기능을 상실하며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으며, 교통의 중심이 된 의정부가 양주 지역의 새로운 행정,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결국 양주군청, 경찰서, 법원, 학교 등이 모두 의정부로 이동하게 되자, 주내를 비롯한 옛 양주의 중심지는 급격한 쇠락을 맞이하였다. 이에 따라 가업장도 예전의 규모를 잃고 쇠락하는 대신 새로이 의정부장이 활성화되어 1940년경에 이르러 전통적으로 유지되던 가래비의 3, 8장을 의정부장에 빼앗기고 새로이 1, 6장으로 변환되는 한편 장의 규모도 대폭 축소되는 결과를 맞는다.

이와 같은 가업장의 쇠락은 근래에까지 이어져 비록 장은 유지되지만 예전의 규모는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일제 강점기 후반에 정립된 4, 9일장이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양주문화원 뒤 개울가를 따라 작은 규모로 열리며 주로 잡곡, 의류, 그릇 등이 거래되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가래비 지역에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한 소규모 공장들이 운영되고 이들과 주민들을 겨냥한 상설 상점가가 형성되고 대규모의 유통 센터가 들어오면서 장터 활성화의 전망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다.

[관련 기록]

가업장의 명칭은 기록에 따라 『임원경제지』[1827]와 『여도비지(輿圖備志)』[1852]에는 3, 8일 장인 가라비장, 『경기지(京畿志)』[1842]와 『경기읍지(京畿邑志)』[1871]에는 3, 8일 장인 가업장, 『조선의 시장경제』[1929]에는 추교장, 『조선의 시장』[1942]에는 가납장 등으로 나타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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