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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청년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504
한자 楊州靑年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창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2년연표보기 - 구명회 주도로 양주청년회 결성
성격 청년 단체
설립자 구명회|윤원세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양주 지역에 있었던 청년 단체.

[개설]

3·1 운동 이후 무력만으로는 한국을 지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일제는 그때까지의 무단 통치 방식을 변경하였다. 조선 총독으로 새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이른바 문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 1920년대 초반 한국은 노동 운동, 농민 운동의 이념과 조직이 채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고, 그 영향력도 미미한 형편이었다. 따라서 당시 민족 해방 운동의 양대 세력으로 나뉘었던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은 1920년대 초반까지는 각기 청년 단체를 세력 확장의 주요한 기반으로 삼았다.

1923년 이후 민족주의 진영의 물산 장려 운동과 민립 대학 기성 운동이 성과를 보지 못하고 쇠퇴하게 되자, 전국의 수많은 청년 단체에 사회주의 이념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초기에는 양주 지역에서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있는 사상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군내 청년 단체를 중심으로 한 청년 운동은 순수한 계몽 활동에 치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년 단체의 결성과 함께 양주 지역에서는 소년 단체도 조직되어 소년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당시의 소년 운동은 조선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소년을 해방하고, 그들에게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부여하려는 운동이었다. 즉 1920년대의 소년 운동은 소년을 올바르게 키우고자 하는 지식인들의 노력으로서 넓게는 중요한 인권 운동의 하나였다.

또한 소년 운동을 단지 소년의 인권을 신장시키려는 목적만이 아니라, 소년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민족 해방과 자주 독립을 도모하려는 하나의 항일 운동으로 여기고 있었다. 소년 단체는 1920년대 이후로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활발히 결성되어 자신의 발전과 함께 지방 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양주에서도 3개의 소년 단체를 중심으로 소년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설립 목적]

양주청년회는 지·덕·체의 발달과 사회 단결, 풍속 교정, 덕성 함양, 지식 개발, 산업 진작 등을 목표로 하는 사회 계몽 성격의 운동을 펼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1920년 전국 조직으로 조선청년연합회가 창립되어 조선인의 각종 단체들의 연합 단체로 조직화되었다. 그 지방 조직으로 1922년 봄 양주청년회가 조직되었으며 의장에 구명회(具明會)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서울청년회 등 18개 다른 단체와 함께 조선청년연합회를 탈퇴했으며 1923년 3월 이영(李英), 한신교(韓愼敎), 정백(鄭栢), 조봉암(曺奉巖) 등이 창립한 전조선청년당에 참여하였다.

1923년 5월 13일 개최한 제2회 정기 총회에서는 직제를 개편, 종래의 회장제를 이사제로 변경하고 이사장에 구용조(具容祖), 상무이사에 구명회, 이사에 김현경(金顯敬)·김기윤(金基潤)·구봉식(具鳳植)·이기종(李基鍾)·김종화(金鍾和)·이복영(李福永) 등이 선임되었다. 이후 양주 지역의 청년 운동을 펼쳐 나갔으며, 동아일보 양주분국의 후원 속에 전양주 정구 대회 등을 주최하기도 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0년대 이후 청년 단체는 지역의 모든 운동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양주 지역 청년 단체의 주요 활동은 야학회 개설, 강연회 개최, 산업 장려 등이었다. 이러한 활동 방침은 전국 각지 청년 단체의 활동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야학회에서는 인쇄소 직공, 관청 급사 등 노동에 종사하는 소년과 청년, 연령 관계로 취학할 곳이 없는 일반 청년, 불우 아동, 그리고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조선어와 한문 등을 무보수로 가르쳤다.

강연회는 청년들 간의 신학문에 대한 탐구와 새로운 사상의 수용, 더 나아가서는 일반 대중의 교화 계몽을 위해 청년 단체가 실시한 주요 활동 중의 하나였다. 강연회 내용은 청년 또는 청년 단체의 책임과 사명에 관한 문제를 가장 많이 다루었다. 그 밖에 인생 혹은 인권에 관한 문제, 경제 발전에 관한 문제, 여성 문제, 종교 일반에 관한 문제, 지방 발전과 국가 및 민족의 장래에 관한 문제 등이 주요 의제였다.

산업 장려에 대한 강조는 전통적으로 실업을 천시하여 온 조선의 잘못된 관습을 타파하고, 현실적으로는 일제의 가혹한 경제적 수탈에 대항하여 경제적 자립을 꾀해 보려는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각지의 청년 단체에서는 경제적 지식 보급에 앞장섰고, 근검과 저축을 장려하며, 부업도 많이 권유하였다.

청년 단체의 활동 방침과 관련하여 양주군 시둔면 금오리[현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에 위치했던 금오청년회는 당시 양주군의 경제,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지방 발전과 산업 진흥이 무실역행(務實力行)에 있음을 강조하고 청년회가 공동으로 토지를 임차하여 회원 전체의 공동 작업으로 연 30~40석을 추수하였다. 수입은 청년회의 기금으로 비축되어 양주군 내 경제, 문화 발전을 위해 사용되었다. 회장이었던 윤원세(尹元世)의 노력이 특히 컸다. 이 외에도 청년 단체의 활동으로는 토론회와 체육 행사 개최 등이 있었다. 토론회의 개최는 청년들 간의 지식 개발과 일반 민중의 교화에 크게 공헌한 활동 중의 하나였으며, 체육 행사로는 운동회 등을 개최하여 건강 증진에 일조를 하였다.

청년 단체 외에도 1924년 당시 양주군 내에는 보통학교 5개, 간이 실업 학교 1개, 사립 학교 2개, 서당 158개 등의 교육 시설이 있었다. 군내 청년 단체들의 야학회 운영, 강연회 개최, 산업 장려 등이 활발했던 것과 병행하여 각 교육 기관의 순수한 교육 활동도 이루어졌다. 이는 1920년대 이후 군내에서 동창회, 친목회, 그리고 운동회 등이 빈번하게 개최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양주 지역의 청년 학생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청년 단체와 교육 기관을 통해서 주로 야학회 운영과 강연회 개최, 그리고 체육 행사 등을 기획하고 개최하는 등 청년 학생 상호간의 친목 도모 및 자기 발전과 경제적 권리 회복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계몽 활동을 활발히 전개함과 동시에 일제에 직접적인 저항도 도모하였다. 특히 청년 단체의 활동은 여러 악조건에서도 일제의 법망을 피해 지방 문화 발전과 민족 해방 운동의 내실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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