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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479
한자 三一運動
이칭/별칭 기미독립운동,3·1 만세 운동,3·1 독립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창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27일연표보기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800여 명 참가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28일연표보기 -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오산리, 600여 명 참가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28일연표보기 -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가납리, 950여 명 참가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연표보기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교현리, 300여 명 참가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30일연표보기 -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 600여 명 참가
발생|시작 장소 백석면 3.1 만세 운동 - 경기도 양주시 백석면 연곡리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장흥면 3.1 만세 운동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가래비 3.1 만세 운동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주내면 3.1 만세 운동 - 경기도 양주시 주내면 유양리지도보기
종결 장소 각 면소재지
성격 만세시위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진성|백남식|이용화|안종규|안종태|김대현|이사범|조필선|이회명

[정의]

1919년 3월 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경기도 양주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운동.

[역사적 배경]

양주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까지 지역민의 동조와 호응 속에서 무장 의병 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고장이다. 특히 임진강과 한남정맥의 전략적 지세와 활발한 의병 활동으로 1907년 전국의 의병 부대가 연합하여 13도 창의대진소를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을 때 본부 지휘소와 함께 전국 의병의 집결지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의병 항쟁이 마지막까지 전개되었던 곳이다.

[경과]

3·1 운동 당시 14개 면에서 시작된 양주군의 만세 운동은 3월 13일과 14일에 걸친 미금면 평내리 봉기를 시작으로, 3월 31일의 진접면 장현리 봉기에 이르기까지 연인원 1만여 명, 시위 횟수 22회에 달하는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현재 양주시 관내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던 곳은 광적면·백석면[현 백석읍장흥면·주내면[현 양주1동]이다.

광적면의 만세 시위는 면소재지인 가납리에서 시작되었다. 가납리는 400여 년 이상을 지속해온 전통 5일장인 가래비장[추교시장으로도 불림]이 있었고, 당시 3일과 8일 장이 열리고 있었다. 가래비장은 인근의 파주군[현 파주시] 봉일천장과 포천군[현 포천시]의 솔모루장과 함께 서울 북부 지역의 물산이 집결되는 상권의 중심지였다.

3월 초부터 만세 운동의 소식이 전해지고, 만세 시위를 추동하는 사발통문이 나도는 등 만세 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광적면의 만세 시위는 양주군 내 만세 시위 중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3월 28일 오후 효촌리 출신의 김진성(金辰成)·백남식(白南式)·이용화(李龍和) 등이 주동, 일장기를 변조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시위대를 이끌고 가납리에 도착하였다.

도착 당시 광백면·백석면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부르다가 해산하는 중이었는데, 김진성 등과 다시 합세하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를 불렀다. 시위대 수는 950여 명에 달하였고, 오후 4시경까지 시위를 벌였다. 광적면 만세 시위는 규모면에서도 그렇지만,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에 굴하지 않고 전개되었던 대표적인 사례다. 선두에 있었던 시위 대원 김진성·이용화·백남식 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백석면의 만세 시위는 연곡리에서 시작되었다. 만세 시위의 계획은 연곡리 구장인 안종규(安鍾奎)[1889~1946]와 그의 형인 안종태(安鍾台)가 주동이 되었다. 만세 시위는 3월 27일 밤에 시작되었다. 안종규·안종태 형제는 다음날인 3월 28일 김대현(金大鉉)·이사범(李士範)·조필선(趙弼善) 등 주민 600여 명과 함께 10여 리 떨어진 오산리 대들벌로 시위 군중을 지휘하여 행진하면서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는 백석면사무소까지 진출하여 계속되었다. 안종규는 농사를 지으면서 마을 구장 일을 보던 31세의 젊은이였다. 그는 이틀간의 시위를 주도한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동지들과 함께 기소되어 1919년 5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장흥면의 만세 시위는 면소재지인 교현리에서 양반 출신 이회명 등이 주동이 되어, 3월 28일 밤 8시경 동리 주점 앞에 수십 명이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다음날 300여 명의 참여 속에 면사무소 앞으로 시위 행렬이 이어졌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시위대 1명이 숨지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주내면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늦은 3월 30일 양주군의 중심지인 유양리[현 양주시 유양동]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유양리는 조선 시대 양주군의 치소가 있었던 곳이고 군청이 소재하는 행정 중심지로, 일찍이 근대적 교육 기관인 소학교[1907년 이후 보통 학교]가 있었으며, 교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주민 600여 명이 독립 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와 헌병 분견소를 공격하는 등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2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결과]

경기도 양주군의 3·1 운동은 만세 운동이 농촌 사회로 전파되는 양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1 운동 초기 중앙의 종교 조직이나 중앙의 민족 대표와 연결된 도시 중심의 만세 시위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비록 장흥면의 경우 양반, 그리고 주내면의 경우 일부 학생이나 기독교도가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만세 시위의 주체는 대부분 농민이었다.

시위 형태는 횃불 시위와 연합 시위, 무력시위 등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대부분 리 단위에서 시작되어 면 단위로 발전, 확산되었으며, 면과 면의 연합 시위로도 발전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3·1 운동의 공통된 의지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양주군 만세 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준비 단계에서 발각되어 시위가 사전에 실패한 경우가 없었다는 점이다. 계획과 추진이 치밀하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양주군의 만세 운동은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며, 면사무소와 헌병 분견소가 주된 공격 대상이었다. 따라서 일본 헌병과 접전을 벌이며 총격으로 인한 희생자가 발생하는 등 무력시위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장흥면의 경우 일본 헌병이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만세에 동참하고, 광적면의 경우 도망치는 면장에게 돌팔매를 하며 뒤쫓아 가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양주 지역 3·1 운동의 특징은 첫째로 농촌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구장[이장]의 역할이 컸다는 점이다. 일제의 1917년 조선 면제 법제화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향촌 사회는 여전히 구래의 면리제(面里制) 전통 위에서 이장은 향촌 사회의 말단 실무를 관장하며 마을의 여론을 조절하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장들 가운데 상당수는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동민들을 동원하고, 이를 위한 사전 연락을 취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백석면 만세 운동에서 구장 안종규의 활약이 대표적이다.

둘째는 시위의 적극적인 참가 계층이 농민과 청년, 학생들이었다는 점이다. 농민 가운데에서는 특히 20~30대의 청년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농업에 종사하면서 서당 교육이나 근대 교육 등으로 일정한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독립 선언서를 등사, 배포하기도 하고, 농민들의 시위를 조직하기 위한 격문, 통문 등을 배포하여 운동을 조직화하는 데 앞장섰다. 양주의 거의 모든 시위에서 농민, 청년, 학생의 역할은 절대적이었고, 이것은 당시 양주의 높은 교육열에 기인한 것이다.

셋째는 장날을 이용한 시위가 많았다. 많은 군중을 동원하고 시위운동을 촉발시키는 데에는 장터가 유리하였다. 장날을 이용한 시위는 사전에 미리 연락을 취하여 주동자가 군중 앞에 나서 연설하고, 제작한 태극기나 독립 만세기, 선언서, 격문 등을 살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특히 가래비 3·1만세 운동, 이담면 동두천리 만세 운동이 대표적이다.

넷째는 시위의 양상이 공격적인 싸움으로 발전해 투쟁의 강도가 높았다. 대체로 처음에는 단순한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점차 면사무소나 분견소를 공격하면서 일본 경찰과 직접 충돌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양주군 내 폭력 투쟁의 양상은 군내 운동 발생 기간인 3월 14일~31일 사이에 일제가 발포한 경우가 여섯 차례, 일본 경찰과 직접 충돌하여 사상자를 낸 경우가 세 차례 등 투쟁의 강도가 높은 편이었다.

다섯째로 야간에 횃불 시위를 시도했고, 기독교인, 천도교인, 승려 등 종교인들이 주도한 시위가 있었다. 당시 양주군 내의 종교 기관은 미약했으나, 3·1 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데는 천도교와 기독교의 역할이 컸다.

양주군의 3·1 운동은 중앙 민족 대표와의 연계가 거의 없었고, 군내에 특별한 비밀 결사 조직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민의 대다수가 시위에 자발적으로 적극 참여하였다.

만세 운동의 결과 양주군민은 경제적인 자립 의지를 증대시켜 나가고, 사회 참여가 확대되면서 1920년대 들어 농민, 노동, 청년, 소년 단체 등 사회단체의 결성이 속출하였다. 3·1 운동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는 각종 단체의 결성을 통해 군민들은 이념적, 조직적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키워 나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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