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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518
한자 六二五 戰爭
이칭/별칭 한국 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정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 - 6·25 전쟁 발발
종결 시기/일시 1953년 7월 23일 - 휴전 협정 조인
전개 시기/일시 1950년 6월 28일 - 북한군 서울 점령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15일 - 인천 상륙 작전 개시, 서울 수복 및 북진 전개
전개 시기/일시 1950년 10월 19일 - 중공군 개입
전개 시기/일시 1951년 1월 4일 - 서울에서 철수
전개 시기/일시 1951년 6월 - 휴전을 위한 회담 개시
발생|시작 장소 6·25 전쟁 - 경기도 양주시
종결 장소 6·25 전쟁 - 경기도 양주시
성격 전쟁

[정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경기도 양주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6·25 전쟁은 1948년 남북한에 이념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고 양측에 대한 우방국의 지원이 갈라지게 되자 정치적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북한군의 남침으로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은 1953년 7월 23일 당시까지의 전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정하고 포로 자유 송환을 골자로 하는 휴전 협정이 조인되는 순간까지 3년간에 걸쳐 참혹하게 전개되었다.

6·25 전쟁에는 미국을 포함한 유엔(UN) 16개국의 참전, 소련군과 중공군의 직간접적 개입 등이 있어 이데올로기 전쟁으로도 평가된다. 6·25 전쟁 기간 동안 양주 지역은 공산군에 의한 양민 학살 사건을 겪는 등 엄청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당하였고, 향후 재건에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 했다.

[역사적 배경]

6·25 전쟁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의 지원을 받는, 이념이 다른 두 정권이 정부를 세우면서 예고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 사건, 지리산을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 전개된 인민 유격대, 소위 빨치산 활동, 이에 대한 군경 합동 토벌 작전의 전개 등이 이어졌다. 한편 경제면에서 토지 개혁을 위한 농지개혁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었으며, 1949년 3월 국회 프락치 사건과 김구(金九) 암살 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잠재된 폭발성은 커져갔다.

이후 미국 국무 장관 애치슨이 한국에 대한 미국 태평양 지역 불후퇴 방어선 제외를 표방한 애치슨선언을 발표하면서 북진 통일론이 분위기를 잡아가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북진 통일론은 1950년 5월 30일 국회 의원 선거에서 반대 여론에 부닥쳤다. 더욱이 38선 부근에서 빈번하게 일어난 무력 충돌은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다.

[경과]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 방어의 중심선 중 하나인 양주·의정부 지구를 방어하던 7사단은 한강을 건너 퇴각하였고, 6월 28일 이후 북한군은 서울을 완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전환점으로 서울 수복과 북진이 전개되면서 양주 지역도 회복되었다. 그런데 10월 19일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인해 12월말부터 밀리기 시작해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철수해야 했다. 그리고 1951년 6월부터는 휴전을 놓고 회담이 지루하게 전개되면서 소강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양주 지구는 당시 포천, 의정부 일대와 더불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있어 주요 주둔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결과]

1953년 7월 23일 마침내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전쟁 과정에서 양주 지역은 크나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전쟁 기간 중 양주군 남면 상수리에서는 빨치산들에 의해 남양 홍씨 문중 집단 학살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4,400여 명의 인명 피해, 주택 2만 5106채 중 전파 1만 3053채, 반파 1,549채에 이르렀다. 초등학교 34개교 중 1만 9831㎡가 전소 피해를 입었고, 중학교 2개교도 3726㎡가 전소되어 파괴되었다. 이처럼 6·25 전쟁으로 인해 양주 지역은 유형무형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엄청난 인명 피해와 물질적 피해를 가져왔다. 또한 민족 내부에는 증오의 적대감과 첨예한 이념 대립을 초래하였다. 남북한은 전쟁 이후 정치, 경제, 문화, 이념 등 모든 면에서 이질적인 사회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양주에서도 전쟁 전후 및 전쟁 과정에서 이념 대립, 학살로 인한 주민 갈등 등이 그대로 나타났다.

하지만 양주시는 6·25 전쟁 피해를 겪고 군사 도시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의 단합과 열정적인 복구 노력을 통해 새로운 양주시를 일구어내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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