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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809
한자 柳洸
이칭/별칭 무숙(武叔)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2년연표보기 - 유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6년연표보기 - 중광문과 병과 급제
몰년 시기/일시 1620년연표보기 - 유광 사망
묘소|단소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가마골로[부곡리]
신도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가마골로[부곡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고흥
대표 관직 교리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고흥. 자는 무숙(武叔). 고려 때 시중을 지낸 유탁(柳濯)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사간 유충관(柳忠寬)이고, 할아버지는 주부 유탱(柳樘)이며 아버지는 선공감 감역 유몽사(柳夢獅)이다. 어머니는 이언순(李彦諄)의 딸이다. 부인은 한극겸(韓克謙)의 딸로, 임진왜란 때 피란을 다니다가 멀리서 왜군을 보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이에 조정에서 한씨의 정절을 기려 정려문을 내렸다. 딸은 유득붕(柳得朋)에게 시집갔다. 둘째 부인 이씨(李氏)와의 사이에서 양성 현감을 지낸 유지호(柳之豪)를 낳았다.

[활동 사항]

유광(柳洸)[1562~1620]은 임진왜란 때 위포(偉布)로서 임금이 탄 어가를 수행하여 용만(龍灣)[의주의 별호]까지 갔다. 이후 금오랑[의금부에 소속된 종5품 도사의 별칭], 내공랑이 되었고 복판외전(僕判外典)으로서 연천, 장성반(長城半), 전주, 능성(綾城) 등의 수령을 지냈다.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각(臺閣), 춘방아상(春坊亞相)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유광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가 병들어 약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자 손가락을 찢어 그 피를 먹게 하였다. 향촌에 살 때는 주민들과 함께 여씨향약(呂氏鄕約)[11세기 송나라 때 향촌을 교화, 선도하기 위해 만든 자치 규약]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태창(泰昌)에 기거하던 중 1620년(광해군 12) 겨울 풍병(風病)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묘갈은 가의대부 이조 참판 겸 예문관 제학 흥양군(興陽君) 유몽인(柳夢寅)이 글을 짓고, 병조 참지 지제교 배대유(裵大維)가 썼다.

[상훈과 추모]

유광은 임금이 동교(東郊)에 있을 때 복정(僕正)으로서 일을 잘 수행하여 품계를 상으로 내렸는데, 유광의 상을 치르던 날 임금이 그의 노고를 기록해 두었다가 전례에 없는 통정대부 병조 참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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