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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824
한자 李敏采
이칭/별칭 치행(稚行)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정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40년연표보기 - 이민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77년연표보기 - 증광시 을과 1위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86년연표보기 - 헌납
활동 시기/일시 1788년연표보기 - 승지
활동 시기/일시 1791년 - 목릉 헌관으로서 제향을 잘못해 벼슬을 그만둠
활동 시기/일시 1792년연표보기 - 양주목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92년연표보기 - 양주 어사대비 건립
부임|활동지 양주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141-2
입비 어사대비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141-2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한산
대표 관직 양주목사

[정의]

양주목사를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치행(稚行).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이여절(李汝晢), 할아버지는 이기흥(李基興), 아버지는 이사술(李思述)이다. 친아버지는 이사묵(李思默)이고 어머니는 송경석(宋慶錫)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민채(李敏采)[1740~?]는 충청도 덕산 출신으로 1777년(정조 1) 38세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 1786년(정조 10) 헌납(獻納), 1788년(정조 12) 승지(承旨)에 이어 1791년(정조 15) 목릉(穆陵)의 헌관이 되었다. 제향하는 날 저녁 흑단령 차림으로 능관(陵官)에게 향(香)을 건네는 예를 치르고, 제사를 지낼 때에야 천담복(淺淡服)으로 갈아입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것이 감찰(監察) 임무원(林懋遠)에게 적발되자 사죄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민채가 양주목사를 지낼 때인 1792년(정조 16) 9월 10일 광릉(光陵)에 참배를 갔던 임금이 전령을 보내 양주목 2㎞[5리] 앞에 관졸을 거느리고 나와 꿇어앉아서 맞이하라고 일렀다. 임금은 이민채의 보필을 받아 양주 관아에서 묵으면서 민정을 살피고,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또 신하들과 더불어 사대(射臺)에서 활을 쏜 후 향연을 베풀었다. 이민채는 임금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직접 비문을 써서 어사대비(御射臺碑)[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82호]를 건립하였다. 이때 임금을 잘 보필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참판으로 승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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