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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477
한자 楊州牧使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직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근대/개항기
집필자 이도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466년연표보기 - 양주도호부에서 양주목으로 승격
시행 시기/일시 1470년연표보기 - 최초의 양주목사 파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양주목을 양주군으로 변경
성격 관직
품계 정3품

[정의]

조선 시대 양주목[현 경기도 양주시]을 관할하던 최고위 관직.

[개설]

조선 초기 양주는 양주군, 양주도호부를 거쳐 1466년(세조 12)에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수도 한성부를 보좌하는 기보(畿輔) 지역으로서의 특성을 감안하여 중요 지방 행정 구역인 목(牧)이 된 것이다. 양주목연산군 때 잠시 폐지되었다가 중종 때 다시 부활하여 1895년(고종 32) 전국의 지방 행정 구역을 정비할 때까지 양주목으로 있었다.

양주목이 생겨난 것은 1466년이지만 중앙에서 양주목사가 파견된 것은 1470년(예종 1)으로, 최초의 양주목사는 이원효(李元孝)이다. 이후 조정의 많은 사람들이 양주목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조선 후기에는 양주목사를 거쳐야 조정 대신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중 중요한 인물을 살펴보면, 성종의 장인이며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였던 윤호(尹壕), 조선 중기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백인걸(白仁傑), 임진왜란 당시 왜병과의 싸움에서 많은 전공을 올린 고언백(高彦伯), 사도세자의 장인이며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 등이 있다.

또한 조선 후기 남인과 노론, 소론이 벌인 붕당 정치의 파벌 속에서 각 세력이 권력을 잡는 순간 바로 양주목사를 자신들의 핵심 인물로 파견함으로써 조정의 안정을 꾀하였다. 1895년(고종 32) 양주목양주군으로 변경되기 전 마지막 양주목사를 역임한 사람은 신태휴(申泰休)로 기록되어 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양주는 수도를 방위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아울러 반정과 반란을 막기 위해 조정의 권력을 잡은 세력이 자신들의 안전 보장을 목적으로 중요한 인물을 선발하여 양주목사로 파견하였다.

[담당 직무]

양주목사는 정3품 품계의 관료로서 평균 2년에 한번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양주목사의 임무는 우선 양주 지역에 있는 선왕(先王)의 능을 보익하는 일이었다. 또한 수도 한성부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수도 한성부를 보좌하고 방위하는 등 군사적 임무도 함께 수행하였다.

[관련 기록]

양주목사와 관련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등 조선 시대 정사류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호구총수(戶口總數)』, 『여지도서(輿地圖書)』, 『양주군읍지(楊州郡邑誌)』 등의 지리지류와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도 기록되어 있다. 특히 역대 양주목사를 역임한 인물이 『경기도읍지(京畿道邑誌)』 양주목편[1899]에 기록되어 있어 그 변화 과정을 잘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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