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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826
한자 李聖求
이칭/별칭 자이(子異),분사(分沙),동사(東沙),정숙(貞肅)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정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4년연표보기 - 이성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3년연표보기 - 사마시 진사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08년연표보기 - 별시문과 을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13년연표보기 - 헌납
활동 시기/일시 1623년연표보기 - 사간
활동 시기/일시 1625년연표보기 - 대사간
활동 시기/일시 1636년연표보기 - 형조 판서, 이조 판서, 병조 판서
활동 시기/일시 1637년연표보기 - 좌의정, 왕세자를 호종하여 심양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641년연표보기 - 영의정
활동 시기/일시 1642년연표보기 - 파직
활동 시기/일시 1642년연표보기 - 영중추부사
몰년 시기/일시 1644년연표보기 - 이성구 사망
묘소|단소 이성구 묘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산90-1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전주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分沙)·동사(東沙). 태종의 아들인 경녕군(敬寧君) 이비(李示+非)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이정(李禎)이고, 할아버지는 이희검(李希儉),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수광(李晬光)이다.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김대섭(金大涉)의 딸이다. 동생은 홍문관 수찬 이민구(李敏求)이다.

[활동 사항]

이성구(李聖求)[1584~1644]는 1603년(선조 36)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서 벼슬 생활을 시작하였다. 광해군 초기에 전적, 감찰에 이어 예조·병조·형조의 좌랑, 부교리·헌납, 병조의 정랑·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헌납으로 있을 때 아버지는 대사헌, 동생 이민구는 홍문관 수찬으로 삼부자가 삼사(三司)의 언관직을 맡아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이에 이성구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일가의 3인이 삼사에서 나란히 벼슬하고 있으니 위태로워지겠구나!”라고 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이천 현감(伊川縣監)을 거쳐 1616년 영평 판관(永平判官)이 되어 포천도 함께 다스렸다. 1618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던 이항복(李恒福)이 북청의 유배지에서 죽자 포천의 향민들이 운구해 장사지내고 서원을 세워 봉사하였는데, 이 일로 이성구는 무고를 당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왕이 바뀐 후 사간원 사간이 되어 어지러워진 정치 질서를 바로잡았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인정을 받아 강화부 윤·부승지·예조 참의를 거쳐 1625년(인조 3)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병조 참지에 올랐다. 1627년(인조 5) 이조 참의로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 왕세자를 전주로 호종하였고, 이듬해 좌승지로서 무과(武科)의 시관(試官)을 맡았다. 이때 길주(吉州)에서 ‘민막 16조’가 올라오자 주동자를 가려 처벌하였다.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전라 감사가 되었다. 그해 겨울 아버지 이수광이 죽어 장례를 치렀다.

1636년(인조 14) 형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와 체찰부사(體察副使)를 겸하였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청나라와 강화를 맺어 전쟁을 끝내자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의 의견에 동조하여 뒤에서 임금의 항복을 거들었다. 이듬해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이 중국 심양(瀋陽)으로 끌려갈 때 아무도 따라나서는 사람이 없어 좌의정이던 이성구가 수행하였다.

1641년(인조 19)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승지 홍무적(洪茂績)의 모함으로 사직하였다. 얼마 후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선천 부사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국가 기밀을 누설한 사건을 따지다가 파직되어 양화강(楊花江) 부근에 만휴암(晩休庵)을 짓고 산천을 오가며 은둔하였다. 이때 자치 규약인 「서호향약기(西湖鄕約記)」를 지어 향촌 사람들에게 실천할 것을 권하였다. 병석에 있던 중 1644년(인조 22) 정월 세자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마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나려다가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분사집(分沙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산90-1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3.20 한자 수정 [가계] 이비(李裶) -> 이비(李示+非)
이용자 의견
정** 가계
경녕군의 휘자 裶를 示+非로 수정하여 주십시오 . 경녕군의 휘자는 衣변이 아니고 示변입니다.
  • 답변
  • 디지털양주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경녕군 이비의 한자를 수정하였습니다.
2017.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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