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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895
한자 李睟光
이칭/별칭 윤경(潤卿),지봉(芝峯),문간(文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3년연표보기 - 이수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2년연표보기 - 진사 합격
활동 시기/일시 1585년연표보기 - 승무원 부정자
활동 시기/일시 1589년연표보기 - 성균관 전적
활동 시기/일시 1590년연표보기 - 호조 좌랑, 병조 좌랑,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북도 선유어사
활동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성균관 대사성, 진위사로 명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601년연표보기 - 부제학, 『고경주역』을 교정함
활동 시기/일시 1602년연표보기 - 『주역언해』를 교정함
활동 시기/일시 1603년연표보기 - 『사기』를 교정함
활동 시기/일시 1605년연표보기 - 안변 부사
활동 시기/일시 1607년연표보기 - 홍주 목사
활동 시기/일시 1611년연표보기 - 명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614년연표보기 - 『지봉유설』 편찬
활동 시기/일시 1616년연표보기 - 순천 부사
활동 시기/일시 1623년연표보기 - 도승지 겸 홍문관 제학, 대사간, 이조 참판, 공조 참판
활동 시기/일시 1625년연표보기 - 대사헌
몰년 시기/일시 1628년연표보기 - 이수광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93년연표보기 - 순천 청수서원에 배향됨
출생지 장단 - 경기도 장단군
거주|이주지 수원 - 경기도 수원시
묘소|단소 이수광 묘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청수서원 - 전라남도 순천시 금곡동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전주
대표 관직|경력 이조판서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고조할아버지는 모양군(牟陽君) 이직(李稙), 증조할아버지는 선사정(仙槎正) 이승손(李承孫), 할아버지는 신당령(神堂令) 이정(李禎)이며, 아버지는 병조판서 이희검(李希儉)이다. 어머니는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다. 아들은 이성구(李聖求)이민구(李敏求)이다.

[활동 사항]

이수광(李睟光)[1563~1628]은 1578년(선조 11) 16세 때 초시에 합격하였고, 1579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1582년(선조 15) 20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1585년(선조 18) 승문원 부정자, 1589년(선조 22) 성균관 전적을 지냈다. 이듬해 호조 좌랑과 병조 좌랑이 되었고,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경상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이 되었다. 하지만 아군의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임금이 있는 의주로 돌아가 북도 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 지방의 선무(先務)[정부의 뜻을 전하여 민심을 안정시킴] 활동에 힘을 쏟았다. 1597년(선조 30)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그해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명나라 수도의 궁궐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수광은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두 번째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안남(安南)[베트남]의 사신을 만나 교유하였다.

1601년(선조 34) 부제학으로 『고경주역(古經周易)』을 교정하였고, 이듬해 『주역언해(周易諺解)』를, 1603년(선조 36)에는 『사기(史記)』를 교정하였다. 1605년(선조 38) 조정 관료들과 뜻이 맞지 않아 안변 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7년(선조 40) 겨울 다시 홍주 목사로 부임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청하러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유구(琉球)[현 일본 오키나와에 있었던 왕국] 사신과 섬라(暹羅)[타이]의 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에 대해 듣고 기록하였다.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이수광은 1614년(광해군 6)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집필하였다.

정국이 혼란해지자 1616년(광해군 8) 순천 부사로 나가 지방 행정에 전념하였다. 57세에 임기를 마치고 수원에 살면서 임금이 불러도 일절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인조 1) 이후 도승지 겸 홍문관 제학에 임명된 후 대사간, 이조 참판, 공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1625년(인조 3) 대사헌을 지낼 때 임금이 올바른 정치에 대한 의견을 내라고 하자 12개 항목으로 된 「조진무실차자(條陳懋實箚子)」를 올렸다. 이조판서를 지냈고, 1628년(인조 6) 세상을 떠났다. 이수광은 성품이 곧으면서도 온화하여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당파 싸움이나 권력 다툼에 휘말리지 않고 오랫동안 관료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지봉집(芝峯集)』 31권과 부록 3권, 『찬록군서(纂錄群書)』 25권이 있다. 대표작인 『지봉유설』은 1614년(광해군 6)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20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1634년(인조 12) 아들 이성구이민구가 간행하였다. 이수광은 세 차례 중국에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미얀마, 베트남 등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물론이고 서양의 문물과 제도도 비교적 자세히 적었다. 천주교 입문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소개하면서 천주교의 교리와 교황(敎皇)에 대해서도 썼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통해 실용성과 실리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발달한 실학(實學)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묘소]

이수광 선생 묘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에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49호이다.

[상훈과 추모]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93년(숙종 19) 순천 청수서원[전라남도 순천시 금곡동]에 배향되었다. 이 사원은 조선 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사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84년에 중건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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