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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888
한자 趙鼎九
이칭/별칭 작농(芍農),월파거사(月坡居士)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전정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0년연표보기 - 조정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9년 2월 6일연표보기 - 양주 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02년 3월 20일연표보기 - 양주 군수 퇴임
활동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양주 사릉리로 낙향
활동 시기/일시 1917년연표보기 - 금강산에 은거
활동 시기/일시 1919년연표보기 - 중국 허난성으로 망명
몰년 시기/일시 1926년 2월 17일연표보기 - 조정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03년 7월 3일연표보기 - 공덕비 건립
거주|이주지 양주 사릉리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거주|이주지 봉선사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부임|활동지 양주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묘소|단소 조정구 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1리 209-1
공덕비 경기도 양주시 1423번길 50[유양동 266]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풍양
대표 관직 의정부 찬정

[정의]

개항기 양주 군수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풍양. 자는 작농(芍農), 호는 월파거사(月坡居士). 아버지는 참정대신에 증직된 조동석(趙東奭)이다. 부인은 전주 이씨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딸이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조정구(趙鼎九)[1862~1926]는 20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 홍문관 부제학, 대사성, 이조 참의, 규장각 직제학, 예조 참판, 양주 군수, 궁내부 특진관, 장례원 소경, 궁내부 협판, 평식원 총재, 의정부 찬정 등을 역임하였다. 양주 군수에 재임한 기간은 1899년 2월 6일부터 1902년 3월 20일까지다.

고종은 자주 명성황후(明成皇后)가 묻힌 홍릉에 가서 친제(親祭)를 했으며, 대한제국 선포 후에는 건원릉(健元陵) 등을 자주 찾았다. 이 지역은 그 당시 양주[현 남양주] 관할 지역으로 조정구는 양주 군수로서 임금의 능 행차 때 도로와 교량의 점검을 책임졌다. 1899년 9월에는 수릉 능역 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마쳐 반숙마(半熟馬) 한 필을 상으로 받기도 하였다. 이후 궁내부 협판, 의정부 찬정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자 이에 항거하는 뜻으로 은사금(恩賜金)과 작위를 거절하고 미망인이라 자처하며 양주 사릉리[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로 들어갔다. 1917년에는 스스로 월파거사라 칭하며 금강산 반야암(般若菴)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1919년 고종이 죽자 상경하여 국장을 치른 뒤 중국 허난성[河南省]으로 망명하였다. 7년 동안 외국에서 떠돌다 둘째 아들 조남익(趙南益)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봉선사(奉先寺)에 기거하다가 1926년 2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1리 석화촌에 있다. 묘는 원형의 봉분에 둘레석을 둘렀고, 상석과 1984년에 외손자가 세운 비석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03년 7월 3일 조정구의 군수 시절 덕행을 기리기 위해 공덕비가 세워졌다.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으나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266번지 양주향교 앞으로 옮겨져 있다. 조정구의 공덕비는 1958년에 복원한 것으로 앞면에 ‘행군수조정구모성아도지비(行郡守趙鼎九慕聖衙道之碑)’라고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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