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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86
한자 洪南杓
이칭/별칭 한산(韓山),일강(一剛),일광(一光),소앙(笑仰),유포심(劉怖深),진덕삼(陳德三),이극화(李克和),김지강(金志剛)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8년연표보기 - 홍남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9년 4월연표보기 - 항일 단체 청년 동지회 결성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월연표보기 - 비밀 결사 자유단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연표보기 - 『자유보』 발행
활동 시기/일시 1925년연표보기 - 조선 공산당 결성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6년연표보기 - 제2차 공산당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6년 8월연표보기 - 상해로 망명하여 코민테른 지부에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7년 4월 10일연표보기 - ‘전민족적 독립당 결성의 선언문’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27년 5월연표보기 - 중국 공산당 상해 한인 지부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 조선 공산당 재건 공작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43년연표보기 - 조선공산주의자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45년 9월 6일연표보기 - 인민 위원과 중앙 인민 위원회 교통부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6년 12월연표보기 - 남조선 노동당 중앙 위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7년연표보기 - 월북
활동 시기/일시 1948년 9월연표보기 - 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
몰년 시기/일시 1950년 6월 3일연표보기 - 홍남표 사망
출생지 경기도 양주
학교|수학지 서울중앙학교 - 서울
활동지 경상남도 양산
활동지 만주
활동지 경기도 양주
활동지 서울
활동지 북한
성격 독립운동가|사회주의 운동가|정치가
성별
대표 경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정의]

경기도 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사회주의 운동가·정치가.

[가계]

호는 한산(韓山)·일강(一剛)·일광(一光)·소앙(笑仰). 일명 유포심(劉怖深)·진덕삼(陳德三)·이극화(李克和)·김지강(金志綱)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유생 홍순석이다.

[활동 사항]

홍남표(洪南杓)[1888~1950]는 경기도 양주의 빈농가에서 태어났다. 1907년 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자 아버지 홍순석은 망국의 한을 품고 음독자살하면서 홍남표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반드시 나라를 되찾으라는 것이었다. 홍남표는 이 유언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며 살았다고 한다. 서울중앙학교를 거쳐 법률 전문 학교에 진학하였으나 학자금이 부족하여 자퇴하고, 양산 통도사에서 경영하는 학교의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비밀리에 한국사를 가르치고,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09년 4월 항일 단체 청년 동지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1919년 1월 유근(柳槿)·김상옥(金相玉) 등과 함께 항일 비밀 결사 자유단을 조직하였다. 3·1 운동이 발발하자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자유보』를 발행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동지 백광흠(白光欽)·유연화(柳淵和) 등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다른 동지와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새배달』이라는 일간지를 발간하여 동포들의 독립 사상을 고취하였으며, 독립 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그 후 북경(北京)에서 군사 통일회에 참가하였으며,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국내에 잠입하려다가 중국 안동현(安東縣)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5년 『시대일보』에 근무하면서 조선공산당 조직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6년 제2차 공산당 중앙 집행 위원이 되어 6·10 만세 운동을 지도하였다. 그 해 8월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코민테른 지부에서 활동하였다.

1926과 1927년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분산된 민족 해방 운동 역량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북경을 비롯한 각지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가 조직되었다. 홍남표는 1927년 4월 10일 공산주의계를 대표하여 홍진(洪震)[민족주의계 대표]과 함께 ‘전민족적 독립당 결성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4월 11일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의 창립총회를 개최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홍진 등과 함께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11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를 개최하였을 때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한편 같은 해 5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상해 한인 지부를 조직하고 그 책임자가 되었으며, 상해 야체이카의 책임 비서가 되었다. 또한 재만조선인반일제대동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어 중국 반제 동맹 운동과 연대하여 반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1년 상해에 돌아와 김단야(金丹冶)·박헌영(朴憲永) 등과 만나 조선공산당 재건 공작을 벌이다가 상해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국내에 압송되어 6년간 옥살이를 하였는데, 옥중에서도 항일 투쟁을 멈추지 않고 비밀 결사를 만들어 활동한 것이 출옥 후 1년 만에 드러나 다시 평양경찰서에 체포되어 만 1년간 취조와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출옥 후 양주에 있는 고향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이때 일제의 계속되는 유혹과 위협이 있었지만 절개를 지켰다. 1943년부터 최원택(崔元澤)·이승엽(李承燁)·조동우(趙東祐)·정재달(鄭在達) 등과 함께 조선공산주의자회를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해방 이후 장안파(長安派) 공산당에 참여하였다가 곧 청산하고 조선공산당에 가담하여 중앙 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을 때 이승만(李承晩)·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55인 인민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인민 공화국을 운영할 중앙 인민 위원회 교통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임시 남북통일 정부 수립과 5년간의 신탁 통치’가 결의되었다. 1946년 1월 신탁 통치에 대한 대응 방안을 둘러싸고 분열된 의견을 조정하기 위하여 공산당·조선인민당·한국민주당·국민당·조선인민공화국·임정 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가졌을 때, 홍남표는 조선인민공화국 대표로 참여하였다. 회의가 결렬된 후 민주주의 민족 전선을 결성하고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남조선 사회 실정 조사 위원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46년 12월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 중앙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6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인 『노력인민(勞力人民)』의 사장을 맡았다. 이후 하지(Hodge, J. R.) 중장이 공산주의의 불법화를 선언하자 이동 편집을 해가면서 동년 8월 15일까지 발행하다가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후 홍남표는 월북하였다. 1948년 8월 25일 북한에서 실시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거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9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50년 6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으로 활동함에 따라 홍남표는 남조선노동당 출신 가운데 가장 오랜 공산주의 활동 경력을 가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02.04 몰년 수정 및 [활동사항] 일부 삭제 <변경 전>몰년: 1960년 6월 3일/6·25 전쟁이 끝난 후 남조선노동당 출신의 당 관료나 정치인들이 상당수 숙청되는 가운데서도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6월부터 1960년 6월 3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변경 후>몰년: 1950년 6월 3일/1950년 6월 3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용자 의견
홍남표 사망 년도에 대해 의문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1950년 6월에 사망한 걸로 알고 있거든요.....
  • 답변
  • 디지털양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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