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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1204
한자 己和
이칭/별칭 득통(得通),함허(涵虛),수이(守伊),무준(無準)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한정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76년연표보기 - 기화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396년 - 기화 관악산 의상암에서 출가
활동 시기/일시 1397년연표보기 - 기화 회암사 자초에게 법요를 들음
활동 시기/일시 1404년연표보기 - 기화 회암사에서 정좌 수행
활동 시기/일시 1406년 - 기화 대승사에서 설법을 함
활동 시기/일시 1410년 - 기화 관음굴에서 선종을 일으킴
활동 시기/일시 1414년 - 기화 연봉사에서 설법을 함
활동 시기/일시 1421년 - 기화 대자사에서 설법을 함
활동 시기/일시 1431년연표보기 - 기화 봉암사 중수
몰년 시기/일시 1433년 4월연표보기 - 기화 입적
출생지 기화 출생지 - 충청북도 충주시
학교|수학지 회암사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지도보기
활동지 대자사 - 개성
활동지 봉암사 -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기념비 봉암사 -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부도 현등사 -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 산163
성격 승려
성별
대표 경력 개성 대자사 주지

[정의]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서 불도를 닦은 조선 초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

[개설]

성은 유씨(劉氏). 호는 득통(得通), 당호는 함허(涵虛). 처음 법명은 수이(守伊)이며, 처음 법호는 무준(無準)이다. 아버지는 전객시사(典客寺事) 유청(劉聽)이고, 어머니는 방씨(方氏)이다. 어려서 성균관에 입학하는 등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21세 때 삭발 출가하여 양주 회암사에서 수행하던 자초(自超)에게서 법요를 듣고 몇 년간 정좌 수행하였다.

기화는 종단 폐합과 사사 혁거(寺社革去) 및 사전 노비(寺田奴婢) 몰수 등으로 조선 초기의 배불 정책이 극에 이르렀을 때, 불교의 정법(正法)과 그 이치를 밝힘으로써 유학의 불교 비판의 오류를 시정시키고자 노력한 고승이었다.

[활동 사항]

기화(己和)[1376~1433]는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친구의 죽음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21세 때인 1396년(태조 5) 관악산 의상암(義湘庵)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수이(守伊)라는 법명을 받았다. 1397년(태조 6) 양주 회암사무학왕사(無學王師)에게 법요(法要)[불사를 할 때 행하는 의식]를 들은 뒤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녔다. 1404년(태종 4) 회암사로 돌아와 정좌 수행을 하여 커다란 깨우침을 얻었다.

1406년(태종 6) 공덕산 대승사(大乘寺)에 들어가 4년 동안 반야경(般若經)을 세 차례 강의하였고, 1410년(태종 10) 개성 천마산 관음굴(觀音窟)에서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켰다. 1414년(태종 14)에는 평산(平山)의 자모산 연봉사(烟峯寺)의 작은 방을 함허당(涵虛堂)이라 이름 짓고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강의하였다. 1420년(세종 2) 오대산 영감암(靈鑑庵)에 있는 나옹(懶翁)의 진영에 제사하였다. 제사 후 잠을 자는데, 꿈에 신승(神僧)이 나타나 이름은 기화(己和), 호는 득통(得通)으로 지어 주어 그 후 기화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1421년(세종 3) 임금의 청으로 개성 대자사(大慈寺)에서 임금의 어머니인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명복을 빌고, 왕과 신하들에게 설법을 하였다. 1424년(세종 6) 대자사에서 나와 길상산, 공덕산, 운악산 등을 다니면서 불법을 가르쳤다. 1431년(세종 13) 문경의 희양산 봉암사(鳳巖寺)로 가서 퇴락한 절을 중수한 다음 그곳에 머무르다가 1433년(세종 15) “죽음에 이르러 눈을 들어보니 시방(十方)이 벽락(碧落) 하나 없는 데도 길이 있으니 서방 극락이다.”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기화자초의 법을 이은 선가(禪家)임에는 틀림없으나 스승과는 달리 교(敎)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고, 사상 또한 교학적(敎學的)인 경향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기화의 선사상(禪思想)에는 현실 생활과 일상적인 생활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조선 초기 유학자들이 배불을 주창하면서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고 비판한 것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입장은 『현정론(顯正論)』에 잘 나타나 있다.

기화는 불교와 유교의 회통(會通) 뿐 아니라 도교까지 포함한 삼교 일치를 제창하였다. 이 삼교 일치의 사상은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의 사상에서도 나타나지만 본격적인 것은 기화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기화의 삼교 일치론은 송나라 계숭(契嵩)이 지은 『보교편(輔敎編)』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유교 측의 강력한 배불론에 대한 호불(護佛)이라고 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장된 것이다.

저서로는 『원각경소(圓覺經疏)』 3권,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1책, 『윤관(綸貫)』 1권 등을 남겼다. 1439년(세종 21) 행장과 어록을 모아서 편찬한 『함허당득통화상행장(涵虛堂得通和尙行狀)』이 있다. 『반야참문(般若懺文)』 1권이 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묘소]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에 기념비가 있고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 현등사에 현등사 함허당 득통탑 및 석등이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8.09 지명 현행화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
2018.08.09 행정명칭 변경에 따른 지명 수정 하면 하판리 -> 조종면 운악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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