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지구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560
한자 寧越地區 戰鬪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용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1년 1월 19일연표보기 - 영월지구 전투 발발
종결 시기/일시 1951년 1월 24일연표보기 - 영월지구 전투 종료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국군 제3군단장 소장 유재흥|제7사단장 준장 김형일|제3연대장 대령 정진|제1대대장 소령 박준호|제2대대장 소령 강순형|제3대대장 소령 이영길|제5연대장 대령 김도영|중령 김인철|제1대대장 소령 신건선|제2대대장 소령 조재준|제3대대장 소령 유재선|제8연대장 대령 이현진|제1대대장 소령 함병갑|제2대대장 소령 김필호|제3대대장 소령 박관영|배속부대제21연대장 대령 김종순|제1대대장 소령 김우영|제2대대장 소령 문태준|제3대대장 소령 최상준|포병 제16대대장 소령 김성

[정의]

1951년 1월 19일부터 1951년 1월 24일까지 강원도 영월지구에서 진행된 전투.

[개설]

영월지구 전투(寧越地區戰鬪)는 1951년 1월 19일부터 1951년 1월 24일까지 강원도 영월지구에서 진행된 전투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초기 북한군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북한군은 3일 만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부산을 제2의 수도로 정하고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가 역전되었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였으며, 1951년 1월 4일 수도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었다. 이 같은 배경에서 국군은 다시 반격의 기회를 잡기 위하여 절치부심하였으며, 이때 강원도 영월을 중심으로 영월지구 전투가 진행되었다. 영월지구 전투를 담당한 부대는 제3군단 예하 제7사단이었다. 제7사단은 김형일 준장의 지휘하에 1951년 1월 19일부터 1951년 1월 24일까지 북한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며, 그 결과 북한군을 격퇴하고 영월을 탈환하였다. 이를 계기로 제3군단은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역사적 배경]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대한민국과 북조선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념이 다른 국가가 등장하자 대립은 지속되었으며, 그 와중에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은 북진 통일론을, 북조선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민주기지론을 제창하며 대립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 같은 배경에서 38선에서는 지속적으로 소규모 무력 충돌이 발생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지시 하에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유엔은 개전 이틀 만인 6월 27일 참전을 결정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시작하였지만, 전쟁 초기 전세는 급격히 북한으로 기울고 있었다. 북한군은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을 점령하였고, 삽시간에 낙동강 이외 대한민국 영토를 대부분 점령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공세를 필사적으로 방어하였으며,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1880~1964] 사령관의 지휘하에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면서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하였다. 인천을 함락시킨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28일 수도 서울을 수복하였으며, 곧바로 북진을 시작하여 10월 1일 삼팔선을 돌파한 것이다.

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통일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 유역까지 석권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1950년 11월 중공군이 전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 함경남도 흥남까지 밀려 철수 작전을 단행하였고, 그 여파로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북한군과 중공군에게 다시 함락되고 말았다.

[경과]

수도 서울을 다시 빼앗긴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과 중공군의 남침을 저지하는 동시에 반격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강원도 영월에서는 제3군단 예하 제7사단장 김형일의 지휘하에 영월지구 방어 계획이 수립되었다. 제7사단은 강원도 정선과 영월 사이의 전선을 확보하면서 해당 지역에 침공하는 적을 무찌르고, 동시에 영월을 탈환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적정(敵情)을 먼저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얻은 정보는 첫째, 적은 평창과 영월 사이에 위치한 울창한 삼림과 험준한 지세에 주저항선을 설정하고, 이에 의지한 채 일부 부대를 재편성하고 있었다. 반면 사단 정면인 정선 북쪽에서 영월로 흐르는 남한강 변에는 병력이 거의 없었다. 둘째, 옥동리를 근거지로 삼은 북한군 제9사단은 국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있었으나 일부 병력은 소백산맥(小白山脈) 쪽으로 남진하였기 때문에 병력이 양분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1951년 1월 19일 오전 8시, 국군 제7사단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망경대산에서 저항하던 북한군 2개 대대 규모의 병력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해당 고지를 점령하였으며, 우측에서는 석항까지, 좌측에서는 주문리까지 진격하여 지역 내의 적을 압박하는 동시에 정선-영월 간의 전선을 유지하였다. 1951년 1월 19일 정진 대령이 이끄는 제3연대는 예미산(禮美山)[989고지]과 이목리에 접하는 전선에서 망경대산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하여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은 거세게 저항하였다. 망경대산을 잃으면 영월에서 석항-녹전리로 통하는 도로를 감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3연대는 포병의 지원하에 세 시간 동안 전투를 수행하여 오후 2시경 망경대산을 점령하였고, 적을 추격하며 산의 서단까지 진출하였다. 제3연대 제2대대는 적 1개 중대 규모의 병력을 격퇴한 뒤, 적을 따라 망경대산 좌측방을 우회하여 주문리까지 추격을 단행하였다. 또 제3연대 제3대대는 점령 중이던 운적산(雲積山)에서 제1대대·2대대의 공격을 지원한 뒤 연대의 예비대가 되었다. 1951년 1월 19일 연대가 거둔 전과는 포로 4명, 사살 72명, 다발총 4정, 소총 16 Ml4Bar 6정의 노획 등이었다. 이현진 대령이 통솔하는 제8연대는 연상리[815고지]에 있는 제1대대만으로 공격을 감행하였고, 북한군 1개 중대 규모의 병력과 격전 끝에 이를 격퇴하고 망경대산 서북쪽 3㎞에 위치한 694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를 통하여 제8연대는 제3연대의 공격에 호응하면서 망경대산의 적을 우측방에서 협공하였으며, 그 결과 23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거두였다. 반면 제8연대는 5명의 전사자와 3명의 전상자를 냈다. 한편 제8연대 제2대대·제3대대는 제1대대의 공격을 지원하면서 935고지-완택산(莞澤山) 간을 확보하고 북쪽 신병산 방면의 적과 대치하였다. 김도영 대령이 이끄는 제5연대는 점령 중이던 935고지에서 오후 5시 공격을 시작하여 석항으로 진격하였다. 직후 제2대대로 하여금 821고지를 점령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제9사단 제3연대와의 연결을 유지하며 제3대대를 통하여 875고지를 점령하게 하였다. 이를 통하여 제8연대 제2대대와 접선한 뒤 제1대대는 예비대로 배치하여 석항에서 후방 경비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1951년 1월 20일, 제7사단은 전날에 이어 적이 주둔하고 있었던 용봉산과 옥동리를 협공하여 점령하였다. 제3연대는 용봉산[1013고지, 응봉산]을 고수하기 위하여 전선에 위치한 대대의 후미에 근접하여 공격을 시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제3연대 제1대대는 망경대산에서 용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공격하다가 988고지에서 북한군과 일대 격전을 벌였다. 이때 북한군은 깊게 판 호 속에서 소화기와 수류탄으로 반격하면서 집중사격으로 맞섰는데, 대대장 박준호 소령이 모든 화력을 집중하면서 일진일퇴의 격전을 반복하였고, 그 결과 오전 11시경 해당 지점을 점령하고 직후 용봉산에서 저항하는 적과 교전을 시작하였다.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1951년 1월 20일 제7사단에 임시 배속된 제23연대는 제3연대와 협동작전을 펼쳤으며, 그 결과 제1대대가 옥동리를 점령하고, 제2대대는 마대산(馬垈山)에서 저항하는 적과 두 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점령 후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또 예비대인 제3대대는 어래산(御來山)에서 4㎞를 진격하여 와골을 점령하고 연대의 후방을 경계하였다. 1월 20일 용봉산 및 옥동리에서 퇴각한 적은 영월 동남쪽 8㎞에 위치한 덕산 우안의 원골에서 지연작전을 시도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

1951년 1월 21일, 제7사단은 영월에서 단양으로 흐르는 남한강 변까지 진격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였으며, 점령지 내 잔류한 적군을 격멸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사단장 김형일 준장은 제8연대장에게 명령하여 동부 영월과 계족산(鷄足山)을 신속히 점령한 뒤 퇴각하는 적을 격멸하게 하였다. 이에 제8연대는 즉각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적을 격파하고, 특히 함병갑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는 계족산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무렵 김필호 소령이 지휘하는 제2대대는 완택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동부 영월을 목표로 돌진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였으며, 직후 퇴각하는 적을 격파한 다음 남한강 연안의 방어진지까지 점령하였다. 그 결과 북한군은 영월을 지키기 위하여 반드시 사수하여야 하는 계족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퇴로마저 차단될 위기에 놓이자 우왕좌왕하다가 분산된 상태로 남한강을 넘어 서쪽 미1군단 지역으로 퇴각하고 일부 패잔병은 북쪽 복덕원 쪽으로 궤주하였다. 한편 제3연대 제3대대는 용봉산에서 안원곡을 목표로 진격하였으며, 제8연대의 계족산 공격에 참여하여 협공하였다. 제2대대는 덕산을 점령한 뒤 이를 제23연대에 인계하였으며, 제1대대는 후방의 예미촌 주문리 지역을 수색하여 패잔병을 처리하였다. 1951년 1월 21일 오후 2시, 연대는 사단장의 명령을 받아 이후 작전을 준비하고자 녹전리에 집결하였다.

1951년 1월 22일, 제7사단장은 군단의 작전계획에 따라 당분간 현재 점령하고 있는 진지를 보강하기로 하였다. 좌익의 미1군단이 단양-제천 전선에서 영월-제천 전선으로 진격할 것을 대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사단의 우일선을 담당한 제5연대는 전방에 대한 수색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때 제2대대는 821고지에서, 제3대대는 875고지-935고지에서 각각 진지를 보강하였으며, 예비대인 제1대대는 전선 4㎞ 전방에 있는 덕천리까지 수색하였다. 그리고 녹전리에 있던 연대 본부는 석항으로 진출하였다.

1951년 1월 23일, 사단은 전선을 유지하면서 제일선 진지를 보강하는 동시에 영월 탈환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제5연대는 전방에 경계 부대를 배치하면서 주진지를 더욱 굳건하게 보강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일선을 담당한 제2대대·제3대대는 진지를 보강하는 동시에 진중 근무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제8연대는 전날 조정한 방어진지를 보강하면서 남한강 남안을 따라 전초기지를 배치하였다. 이때 제3대대는 만지동-삼옥2리 간을, 제2대대는 삼옥2리를, 그리고 제1대대는 동부 영월의 남한강 변을 각각 1개 소대 규모로 점령하여 하여 적과 대치하였고, 연대 본부는 녹전리에서 복덕원으로 나아갔다. 한편 군단의 좌측 일선을 담당한 제23연대는 진지를 보강하던 중 남한강 서쪽 미1군단 담당 방면에서 출현한 적의 패잔병들로부터 간헐적인 기습을 받기도 하였지만 모두 격퇴하였다.

1952년 1월 24일, 제7사단은 사단 작전명령 제75호[1951. 1. 24.]에 의거하여, 영월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3연대는 제2대대를 주공으로 영월의 중심부를 돌파하여 북쪽의 675고지를 점령하게 하였고, 제1대대는 봉래산(蓬萊山)을 점령하되 일부 병력으로 봉래산의 후방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제3대대는 예비대로서 영월로 진격하여 서측방을 방호하는 동시에 일곡에서 미군과 연결하도록 하였고, 새벽 4시에 부대를 제8연대가 점령하고 있던 남한강 남쪽 연안의 삼옥1리-덕포리 간으로 이동시켰다. 공격 준비를 마친 국군은 아침 7시 30분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였다. 주공인 제2대대는 영월을 향하여 신속하게 진격하며 화력전과 백병전을 적절히 조합하여 적을 공격하였다. 이때 제1대대는 봉래산을 점령하고 퇴각하는 적을 휘몰아쳐 모조리 격멸하다시피 하였다. 그 여파로 영월 서쪽에 있던 적은 평창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한편 주공 대대와 거의 동시에 영월로 돌진한 제3대대는 일부 병력으로 남한강 연안을 점령하였으며, 오후 2시에는 좌측에서 공격하던 미17연대 제3대대와 일곡에서 조우하였다. 이 공격 당시 포병의 화력은 주로 적의 퇴로 차단에 집중되었으며, 그 결과 적은 증원부대를 투입하지 못하고 퇴각하는 과정에서도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이 전투로 북한군은 346명이 전사하였고, 17명의 포로와 61㎜ 박격포 1문, 자동소총 3정, 다발총 2정, 소총 83정 등을 국군에게 넘겨주었다. 국군의 피해는 전사 6명에 부상 18명이 다였다.

[결과]

제7사단은 6일간에 걸친 영월지구 전투를 통하여 일찍이 없었던 전승을 거두었고, 그 덕분에 앞서 덕천에서 고전하며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제7사단은 최초의 작전계획대로 영월 남쪽으로 침공한 적을 궤멸시킬 수 있었고, 또 영월까지 탈환하여 정선-영월 간의 진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제7사단은 군단의 반격 작전이 본격화할 때까지 이 지역의 유리한 지형지세를 활용하여 방어전을 지속하고, 차기 작전을 준비하였다.

[의의와 평가]

영월지구 전투는 중공군 개입 이후 1·4후퇴에 이르기까지 열세에 처하였던 국군이 그 태세를 전환하여 다시 공세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촉발된 전투였다. 국군은 영월지구 전투의 대승리를 통하여 동부전선에서 다시 반격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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