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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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台峰戰鬪 |
영어의미역 | Taebong Battl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강윤정 |
[정의]
조선 말기 안동 주변의 7읍 연합 의진(義陣)이 상주시 태봉에서 벌인 전투.
[역사적 배경]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해 1895년 말부터 전국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 때 안동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는데 안동의진은 1895년 12월 초에 시작되었다. 안동의진의 촉발제는 1895년 12월 30일에 내려진 단발령이었다.
[목적]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였다.
[발단]
1896년 3월 14일 대장에 취임한 김도화(金道和)는 지휘부를 조직하고,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2차 안동의진은 호좌의진을 비롯한 인근의 의병들과 연합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안동·호좌·풍기·순흥·영주·봉화·예안 등 7읍은 연합 의진을 결성하였다. 연합 의진은 상주시 함창읍의 태봉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에 공격을 시도하였다.
[경과]
7읍 연합 의진에 참여한 안동의진은 중군장 권재호(權載昊)가 거느린 250여 명이었다. 연합 의진은 태봉을 공격하기 전에 예천군수 류인형(柳仁馨)을 처형하였다. 류인형은 개화파 관리이자 서울에서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온 서울의 경군(京軍)을 접대한 죄로 처형된 것이다. 연합 의진은 눈비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밤을 이용하여 예천 용궁을 거쳐 상주 산양에서 모임을 가지고, 동맹의식을 거행하며 승리를 기원하였다.
3월 28일 밤 연합 의진이 태봉 인근 지역에 분산하여 진을 쳤다. 안동의진은 덕통역에, 호좌의진은 함창에, 영주·순흥·예안의진은 포내촌에, 풍기의진은 당교에, 봉화의진은 동산촌에 머무르면서 공격을 준비하였다. 그날 밤 연합 의진과 일본군과의 전투가 개시되었다. 호좌의진이 일본군을 기습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음날인 3월 29일 아침부터 연합 의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때 일본군 보고에 의하면 의병의 총수가 7,000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일본군의 전력은 50~100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이나, 무기는 의병보다 월등하게 우세했다. 이날 아침부터 시작된 태봉 전투는 제방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제방을 빼앗기고 개울 옆의 산 위에서 대응하던 의진은 저녁 무렵 일본군의 총공격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서상열의 호좌의진은 전투를 재개하려 준비하였지만, 안동의진은 예천을 거쳐 안동으로, 예안의진은 학가산을 거쳐 예안으로 각각 회군하였다.
[결과]
안동의진은 태봉 전투에서 일본군 일부를 사살하는 전과를 수립하였으나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화력과 조직력의 열세를 드러냈다. 7읍 연합 의진은 뚜렷한 지휘계통을 세우지 못한 데다 화력과 전투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크게 패하였다.
[의의와 평가]
안동의진을 비롯하여 인근의 7개 의진은 연합 의진을 결성하여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의리론에 치중한 나머지 조직적인 대응이 결여되는 한계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