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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28
한자 安東義陣
영어음역 Andonguijin
영어의미역 Andong Loyal Troops Unit
이칭/별칭 안동의병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강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부대
발생(시작)연도/일시 1895년 12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896년 9월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안동시
관련인물/단체 권세연|김도화

[정의]

조선 말기 안동에서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던 의병부대.

[역사적 배경]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해 1895년 말부터 전국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 때 안동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는데 안동의진은 1895년 12월 초에 시작되었다. 안동의진의 촉발제는 1895년 12월 30일에 내려진 단발령이었다.

[목적]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였다.

[발단]

단발령이 안동부에 문서로 도착한 것은 1896년 1월 11일의 일이다. 단발령 소식이 전해지자 안동 지역에서는 의병 봉기를 위한 통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안통문(禮安通文)」을 시작으로 「삼계통문」·「청경통문」·「호계통문」이 발의되었다. 각 통문이 발송되면서 안동 유림들은 의병을 조직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경과]

1. 1차 안동의진

안동의진이 처음으로 논의된 장소는 봉정사이다. 봉정사 회합에 참여한 유림 대표들은 안동부에 들어가 의병을 일으키기로 합의하였다. 그 결의대로 다음날 1,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유림대회가 열리고, 1월 20일 거병할 것을 결의하였다. 1월 20일에 안동 시내 삼우당(三隅堂)에서 안동 유림들이 모여 창의를 결의하고, 봉화 닭실[酉谷]의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안동의진이 진영을 갖추고 안동부가 의병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자 관찰사 김석중은 1월 24일 안동부를 탈출하였다. 그러나 1월 29일 도망갔던 김석중은 대구부의 관군을 이끌고 안동부를 탈환하기 위해 예천에 진을 쳤다. 권세연은 김석중을 막아내느라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고 말았다. 이후 의병장 권세연은 의병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하는 등 재기를 준비하였다.

1896년 2월에 들어와 이중린(李中麟)이 이끄는 청량산의진, 박주상(朴周庠)이 이끄는 예천의진이 새롭게 꾸려지면서 안동을 중심으로 반격 대열이 형성되었다. 안동의진 역시 주변 지역 의진들과 연합하여 반격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의병의 기세에 관찰사 김석중은 2월 19일 안동부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김석중은 2월 25일 문경 이강년 의진에 붙잡혀 농암장터에서 처형되었다. 관찰사가 처형된 2월 25일 권세연안동의진을 거느리고 안동부에 무혈 입성하여 안동향교에 진을 쳤다.

권세연은 조직을 정비하고 의연금을 모집하는 등 진영을 정비하였다. 막대한 군자금을 확보한 권세연은 3월 8일 조직을 개편하고 전투에 대비하였다. 새롭게 조직을 편제한 안동의진은 봉화의진과 호좌의진의 서상열의진과 연합하였다. 그런데 일주일 후, 권세연은 한 달여 전에 있었던 패배를 자책하며 스스로 의병장에서 물러났다.

2. 2차 안동의진

권세연의 갑작스러운 사퇴로 안동의진은 새로운 지휘부 편제에 들어갔다. 권세연의 후임으로 향원들은 안동 일직의 귀미마을 김도화를 선출하였다. 3월 14일 대장에 취임한 김도화는 지휘부를 조직하고,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2차 안동의진은 호좌의진을 비롯한 인근의 의병들과 연합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호좌·풍기·순흥·영주·봉화·예천의 연합의진을 결성하였다. 연합의진은 상주 함창의 태봉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다. 연합의진과 일본군과의 전투는 3월 28일 밤에 개시되었다. 일본군 보고에 의하면, 이 때 의병의 수가 7,000여 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의 전력은 50~100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이나, 무기는 의병보다 월등하게 우세했다. 이날 아침부터 시작된 태봉전투는 제방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었다.

연합의진은 저녁 무렵 일본군의 총공격에 밀려 퇴각하였고, 안동의진도 예천을 거쳐 안동으로 회군하였다. 이어 4월 2일 안동의진은 일본군의 기습 공격에 맞서 봉정사안기동 일대에서 전투를 펼쳤지만 크게 패하였다. 안동부로 들어오던 일본군은 안기동에 불을 질렀고, 마침 바람을 타고 탑곡(塔谷), 즉 현재 법흥동 골짜기까지 번져나갔다.

[결과]

안동의진은 일본군이 물러난 후 의진을 갖추고 재항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태봉전투 패전 이후, 특히 안동이 불바다가 된 이후에 인적·물적 자원의 부족으로 혹독한 시련에 부딪쳤다. 거기다 고종은 거듭해서 암행효유사를 파견하여 의병 해산을 종용하였다. 결국 9월 11일 관군이 안동부에 도착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1895년 12월에 거의하여 1896년 9월까지 약 9개월에 걸친 을미·병신년의 안동의진은 항전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안동의진은 일본에게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거의하였으나 의리론에 치중한 나머지 조직적인 대응이 결여되는 한계를 드러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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