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118 |
---|---|
한자 | 英陽南氏 |
영어의미역 | Yeongyang Na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집필자 | 김복영 |
세거지 |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안동시 일직면 송리리|안동시 일직면 광연리|풍산읍 매곡리 |
---|---|
집성촌 | 안동시 길안면 구수리 |
입향시기/연도 | 14세기 중엽 |
성씨시조 | 남민(南敏) |
입향시조 | 남휘주(南輝珠, 1326~1372) |
[정의]
남민을 시조로 하고 남휘주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안동시 세거 성씨.
[개설]
안동의 영양남씨는 시조 남민(南敏)의 둘째 아들 남군보(南君甫)를 파조로 하고 14세기 중엽 안동에 정착한 남휘주(南輝珠, 1326~1372)를 입향조로 하여 와룡면·일직면·풍산읍 일대에 세거해 왔다.
[연원]
시조 남민은 본시 중국 당나라 사람 김충(金忠)으로 755년(경덕왕 14)에 봉명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풍랑을 만나 영해 축산항 부근에 표착하여 신라에 귀화하였다. 경덕왕이 남씨(南氏)로 성을 내리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영양현을 식읍으로 내려 살게 하고 영의공(英毅公)이라는 작호를 내렸다고 한다. 후손들이 의령남씨(宜寧南氏), 고성남씨(固城南氏)로 분파되어 나갔으나 다 남민의 자손이다. 안동에 분포된 영양남씨는 남민의 둘째 아들 남군보의 맏아들 남공약(南公若)의 후손이다.
[입향경위]
『영가지(永嘉誌)』「우거조(寓居條)」에 의하면 남공약의 현손인 남휘주가 처음으로 안동 서가현촌(西可峴村,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에 살았고 무과에 올라 벼슬이 전리판서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자세한 입향 경위는 알 수 없다.
남휘주의 아들 남민생(南敏生, 1348~1403)은 호조참의를 지내고 5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5형제는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남부량(南富良)은 삼척진병마검절사, 남수량(南遂良)은 중령호군, 남의량(南義良)은 수위교위, 남우량(南佑良)은 회령도호부사, 남보량(南普良)은 만호를 역임했으며 사위 황재(黃裁)는 현감, 배남(裴楠)은 정랑이 되었다. 1478년 안동의 일부 사족의 원로 13명이 결성한 우향계(友鄕契)에 남민생의 손자 남치정(南致晶)과 남치공(南致恭), 증손 남경신(南敬身)과 남경인(南敬仁)이 참가하여 사족으로서의 기반을 이루었고, 이들 후손들이 지금 안동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다.
남의량의 손자 남팔개(南八凱), 남팔준(南八俊) 형제가 현재의 일직면 망호2리로 이거하고 남항년(南恒年), 남창년(南昌年) 형제가 일직면 원리에 이거하였으며 남팔개의 증손 허영정(許水+穎亭) 남응원(南應元, 1539~1611)은 효행으로 정려되었다. 남응원의 큰아들 남흥달(南興達)의 후손이 지금까지 일직면 망호2리 일대에 살고 있고, 작은아들 나재(懶齋) 남융달(南隆達, 1565~1652)은 풍산읍 매곡리에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남민생의 후손으로 영달한 이는 남부양의 5세손으로 노림서원(魯林書院)에 제향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1543~1580), 남의량의 8세손으로 문과에 올라 대사간을 지낸 고암(孤巖) 남천한(南天漢, 1670~1686), 역시 문과를 거쳐 경주부윤을 역임한 남천택(南天澤, 1619~1684), 남우량의 8세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통례에 오른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 1620~?), 남융달의 아들로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하면서 쓴 『병자일기(丙子日記)』를 남기고 호조참판에 증직된 유유헌(由由軒) 남급(南, 1592~1671) 등이 있다.
[현황]
[관련유적]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에 안동 영양남씨 재사(安東英陽南氏齋舍)가 있으며, 와룡면 중가구리 남흥 앞산에 남휘주 남민생 부자의 묘소와 묘소를 수호하고 제사를 받들기 위해 지은 남흥재사(南興齋舍)가 있다. 일직면 광연리에 남응원이 세운 허영정이 있고 풍산읍 매곡리에 남응원을 주향하고 남융달, 남급, 남천한을 배향한 봉암서원(鳳巖書院)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