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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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自粹 |
영어음역 | Gim Jasu |
이칭/별칭 | 자수(子粹),순중(純仲),상촌(桑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황만기 |
[정의]
고려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자수(子粹),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 아버지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지제고(知制誥)를 지낸 김오(金珸)이다.
[활동사항]
김자수(金自粹, 1351~1413)는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에 제수되었다. 우왕 초에 정언이 되었는데,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포상 받은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曺敏修)의 사은 편지에 대하여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조민수가 전날 김해와 대구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하여 많은 사졸을 죽게 한 사실을 들어 거부한 죄로 전라도 돌산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전교부령(典校部令)을 거쳐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가 되었고, 공양왕 때 대사성·세자좌보덕이 되었다. 이때 왕대비에 대하여 효성을 다할 것, 왕세자의 봉숭례(封崇禮)를 서두르지 말 것, 사전(祀典)에 기재된 바를 제외하고 모든 음사(淫祀)를 금지하고 무당들의 궁중 출입을 엄단할 것, 천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숭불(崇佛)로 인한 것이니 연복사(演福寺) 탑의 중수 공사를 중지할 것, 언관의 신분을 보장할 것 등의 내용을 담은 상소를 올렸다.
1392년(공양 4)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좌상시에 전보되었고, 충청도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고려 말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하여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지금도 안동시 안기동에 유허비가 남아 있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안동군지(安東郡誌)」의 충신조에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자손에게 결코 묘갈(墓碣)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라고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이숭인(李崇仁)·정몽주(鄭夢周)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저술과 작품]
『동문선(同文選)』에 김자수의 시문이 실려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언으로 묘비는 세우지 않았으며, 신도비는 땅에 묻었다 한다. 1926년 후손들이 신도비를 발굴하였으나, 비문이 심하게 마모되어 신도비를 새로 제작하여 옛 신도비와 함께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