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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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柱宇 |
영어음역 | Gim Juu |
이칭/별칭 | 만고(萬古),이면재(易眠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만기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만고(萬古), 호는 이면재(易眠齋). 증조할아버지는 김정헌(金廷憲)이고, 할아버지는 김몽호(金蒙虎)이다. 아버지는 승정원승지를 지낸 구전 김중청(金中淸)이며, 어머니는 영천이씨로 이영승(李永承)의 딸이다. 부인은 연천군(延川君) 이경엄(李景嚴)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주우(金柱宇)는 1598년 안동(현 봉화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찍이 도산서원에서 대나무 씨앗을 구한 뒤 이에 대한 감사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친구들과 놀다가 그만 편지를 잃어 버렸다. 그래서 텅 빈 편지통에 “도산서원의 나무는 잎사귀마다 퇴계 선생의 유풍을 지녔도다. 선생은 숭앙할 수 있어도 직접 뵐 수는 없으니 이 대나무 몇 그루를 나누어 가지기를 원합니다”라고 절구시 한 수를 썼다.
당시 도산서원의 원장은 계암(溪巖) 김령(金坽)이었는데, 그는 답장에 “편지를 보지 못했지만, 아이가 지은 시 한 수를 보았는데 참으로 천리마가 될 망아지로다”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1624년(인조 2)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었는데, 이때 아버지가 광해군 때 국가에 곡식을 바치고 벼슬을 산 신하라 하여 사간원에서 심한 비판을 받았으나, 김류(金瑬)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관직에 머물렀으며 그 뒤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왕의 강도파천(江都播遷: 강화도로 피난함)에 따라가지 않았다고 하여 탄핵을 받았다.
1632년(인조 10) 경성판관으로 있을 때 집안의 큰 변을 만나 숙부 김득청(金得淸)이 옥에 갇히고 할머니가 자살하였으며, 김주우도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1636년(인조 14) 장기현감과 만경현령, 1643년(인조 21) 충청도사, 1644년 울진현령을 지냈다.
서예에 뛰어나 열세 살 때 진주 촉석루의 액(額)을 썼으며, 1625년(인조 3) 왕명으로 동궁의 대병(大屛: 큰 병풍)에 사잠(四箴: 네 가지의 잠언)을 쓰기도 하였다. 인조는 즉위하기 전부터 김주우의 재질을 알아보고 발탁하여 쓰고자 하였으나, 아버지와 숙부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하급직에 머물고 말았다. 『선성지(宣城誌)』와 『봉화현지(奉花顯誌)』에 김주우의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1644년 향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공주시 유천면 정림 뒷산 대동마을에 있다. 김주우가 울진현령으로 부임한 지 한 달도 채 되어 갑자기 병으로 죽자 생가인 봉화의 만퇴헌으로 옮겨 놓았는데, 방안에 이상한 향기가 가득하여 집안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남편의 부고를 전해들은 숙부인 연안이씨가 공주로 귀장(歸葬)하였다.
[상훈과 추모]
장기현감과 만경현령을 지낸 곳에 거사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