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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273
한자 金坽
영어음역 Gim Ryeong
이칭/별칭 자준(子峻),계암(溪巖),문정(文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황만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성별
생년 1577년(선조 10)연표보기
몰년 1641년(인조 19)연표보기
본관 광산
대표관직 승정원주서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 증조부는 광산김씨 예안 입향조 김효로(金孝盧), 할아버지는 김유(金綏), 아버지는 현감 김부륜(金富倫),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부호군 신수민(申壽民)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령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의 나이로 류성룡(柳成龍)의 막하로 자진 종군했으며, 당시 명군 총병사 오유충(吳維忠)과 유격장 노득공(盧得功) 두 사람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을 정도로 학식이 높았다. 이상정(李象靖)이 찬한 서(序)에 의하면, 1612년(광해군 4)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정자가 되고 1615년 승정원주서로 승진했으나 대북당(大北黨)이 집권함을 보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안동 예안으로 돌아왔다.

1618년 인목대비가 폐위되자 손님을 사절하고 외부와의 교섭을 끊었으나 승정원(承政院)에서 일기를 편수하기 위해 여러 번 상경을 독촉하므로 부득이 한양에 가서 성 밖에서 일기를 닦아 올리고 되돌아왔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6품직을 받고 성균관직강과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고 이어서 전적, 형조정랑, 의주판관을 제수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후로 반신불수로 수족을 움직일 수 없다고 핑계하여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으며 예조정랑, 장령, 보덕(輔德), 집의, 사간 등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17~18년을 병폐인(病廢人)으로 자처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다 한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가산을 모두 털어 의병들의 군량미로 충당했으며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비분강개한 시 몇 편을 남겼다. 김령은 벼슬에서 물러나 처음에는 제자들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 마음을 달랬으나 죽을 때까지 마지막 20여 년 간은 문밖출입을 삼가며 오가는 사람도 방에 앉아 영접하고 보낼 정도로 철저히 은거하여 세상에서 ‘영남의 제1인’이라고 불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계암집(溪巖集)』 6권 5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나소리 방잠한천산(方岑寒泉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1689년(숙종 15)에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는 원액(院額)이 하사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김** 김령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의 나이로 류성룡(柳成龍)의 막하로 자진 종군했으며 2019.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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