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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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昌錫 |
영어음역 | Gim Changseok |
이칭/별칭 | 천여(天與),월탄(月灘),몽선도객(夢仙道客)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만기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천여(天與), 호는 월탄(月灘)·몽선도객(夢仙道客). 아버지는 수직(壽職)으로 중추부동지사를 지낸 김이기(金履基)이고,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충의위(忠義衛) 윤탕빙(尹湯聘)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창석(金昌錫, 1652~1720)은 1687년(숙종 13)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재약(齋約) 6조를 정하고 잠언을 지어 동재생들과 함께 경계로 삼아 지켜왔다. 1689년(숙종 15) 5월 기사환국이 일어나고, 얼마 뒤에 숙종이 정비인 민씨(인현왕후)를 폐출시켰다. 이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김창석이 관학 유생들과 함께 상소문을 올려 부당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승정원이 받아들이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690년(숙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보임된 뒤 제원찰방을 거쳐 아계찰방을 지냈다. 1692년(숙종 18) 중앙으로 들어가 성균관박사가 된 뒤, 성균관전적을 거쳐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노론이 집권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후 아버지를 모시고 내앞[川前]의 동쪽 망천(輞川)으로 이주하여 시를 지으면서 소요하였으며, 1706년(숙종 32) 강원도사가 되어 금강산을 유람하기도 하였다.
한편, 안동부사로 부임한 권이진(權以鎭)이 안동의 선비들을 호계서원에 초빙하여 강회를 했을 때 이재(李栽)·권두경(權斗經) 등과 함께 참석하기도 하였다. 김창석은 의성김씨(義城金氏) 삼학사(三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시·서·화 삼절로 일컬어졌고, 더욱 글씨는 장욱(張旭)·조맹부(趙孟頫)의 묘경(妙境)에 이르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월탄집(月灘集)』 4권 1책이 전한다.
[묘소]
묘소는 안동 임북(臨北) 미면산(美面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