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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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尙志 |
영어음역 | Bae Sangji |
이칭/별칭 | 백죽당(栢竹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배종석 |
[정의]
여말선초 안동 지역에 정착한 문신.
[가계]
본관은 흥해(興海). 호는 백죽당(栢竹堂). 고조부는 고려태사무열공(高麗太師武烈公) 배현경(裵玄慶)의 7세손으로 위위승동정(尉衛承同正) 배약경(裵若卿), 증조부는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낸 배유손(裵裕孫), 할아버지는 전리판서(典理判書)인 배영지(裵榮至), 아버지는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진 배전(裵詮), 어머니는 일직손씨(一直孫氏)로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의 딸이다.
[활동사항]
백죽당은 1351년(충정왕 3) 현재의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고려 말 성리학의 중심에 있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목은집(牧隱集)』 중의 시 「유증선생형직학공(有贈先生兄直學公)」에 배상지의 학문 연원이 잘 나타나 있음). 음사(蔭仕)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다.
조선이 건국될 즈음인 어느 날, 중서랑(中書郞)이 고사를 이용하여 뜰에서 배상지의 무릎을 꿇리고자 하니 배상지는 즉시 관모(冠帽)를 벗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국이 혼란하여 머지않아 변혁이 있을 것을 깨닫고 사직한 뒤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에 머물던 외조부 손홍량을 생각하며 안동 금계촌(金溪村, 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으로 옮겨가 집을 짓고 살았다.
그 뒤 고려의 운이 다하게 되자 배상지는 집 주위에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꿋꿋한 절개를 보여주는 잣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자신의 뜻을 나타내고 그 집을 백죽당(栢竹堂)이라고 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여러 차례 출사의 명이 내려졌으나 자신의 뜻을 그대로 지켜 나갔다. 은거 중 금오산(金烏山)에 숨어 살던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교유하였다.
배상지는 화평을 힘써 가지며 순후하고 삼가는 것을 교훈으로 하여 과정을 착실히 밟아 나가도록 네 아들을 비롯한 자제들을 훈계하였다. 자제들이 모두 뜻을 돈독히 하고 학문에 힘써서 문아(文雅)로 세상에 이름이 남겨져 ‘배문(裵文)’이라는 말이 있게 되었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일찍이 배상지를 높은 절개와 원대한 식견을 가진 인물로 칭찬하였다.
[저술 및 작품]
시집 한 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으며 『백죽당선생실기(栢竹堂先生實記)』에 시 몇 편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출처는 분명하여 전현과 같이 고매하고/ 천 수나 되는 시편은 몇 대나 전했던고/ 백죽은 이미 시들고 경치는 오래되었건만/ 풍류와 높은 운치는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있네.”라고 말하고 또 류성룡도 “선생이 야은 길재 선생과 더불어 도의로 사귀고, 고려가 망함에 모두 절의로 항거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또 창수(唱酬)한 많은 작품이 『야은집(冶隱集)』 중에 나타나는구나.”라고 말한 점으로 보아 많은 양의 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사곡(寺谷)에 있다. 묘비에는 ‘고려판사복시사백죽당배선생지묘(高麗判司僕寺事栢竹堂裵先生之墓)’라고 쓰여 있다.
[상훈과 추모]
네 아들이 배상지가 죽은 뒤 무덤 옆에서 여막살이를 하면서 아버지를 기리는 마음에 효사암(孝思庵)을 지었다. 현재 묘소 아래에 재사(齋舍)와 함께 남아 있으며 후손들이 매년 음력 10월 17일에 전례(奠禮)하고 있다. 배상지의 사후 200여 년이 지난 1690년(숙종 16) 금계마을에 사당을 세우고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과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와 함께 향례하였다. 아울러 사림들의 상소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