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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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山斗 |
영어음역 | Yi Sandu |
이칭/별칭 | 자앙(子昻),나졸재(懶拙齋),청헌공(淸憲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명수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앙(子昻), 호는 나졸재(懶拙齋). 증조부는 이령(李苓), 할아버지는 이명길(李鳴吉), 아버지는 이필(李泌), 어머니는 광주안씨(廣州安氏)로 안칭(安偁)의 딸이다. 이산두의 귀함으로 인해 증조부는 좌승지에, 할아버지는 호조참판에, 아버지는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활동사항]
이산두는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났으며 권증(權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14년(숙종 40)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732년(영조 8) 유생으로 강경거수(講經居首)가 되어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혜를 받았다. 173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고 1758년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763년 가선대부에 오르고, 1766년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1767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1769년 영조는 이산두를 자주 볼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도상(圖像)을 그려서 자손이 직접 가지고 오라는 명을 내렸다. 화상을 가지고 온 손자 이전춘(李全春)에게 영릉참봉을 제수하고, 왕이 직접 화상에 ‘지중추이산두(知中樞李山斗)’라는 여섯 자를 쓰고, 원손으로 하여금 오른쪽에 ‘구십세상(九十歲像)’이라 쓰게 하였다. 1770년 정헌대부에 올랐다. 이산두는 벼슬에 나가서는 치민(治民)의 표상이 되었고, 물러나서는 한 소쿠리의 밥과 표주박의 물(一簞食一瓢飮)로 청빈하고 자적한 생활을 실천하여 선비들의 표상이 되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나졸재집(懶拙齋集)』 4권 2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단호리 중단지골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현재의 안동시 풍산읍 상리리에 있던 풍암서원(豊巖書院)에 제향되었으나 풍암서원은 지금 터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