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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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洪仁 |
영어음역 | Yi Hongin |
이칭/별칭 | 경회(景會),풍은(豊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배종석 |
[정의]
조선 중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경회(景會), 호는 풍은(豊隱). 할아버지는 군자감주부를 지낸 이신(李愼), 아버지는 이전(李荃),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홍여려(洪汝礪)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홍인은 경상도 안동부 풍산현(豊山縣, 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일대)으로 옮겨 살았다. 5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혼자서 자랐지만 제사를 모시거나 분묘를 관리함에 빈틈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량과 재주도 남달랐다. 남들이 벼슬을 권하였지만 응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향리에 거처한 이후 자손들은 벼슬을 달가워하지 않아 형 이영도 음직으로 현풍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몇 달 만에 돌아오고 말았다.
1539년(중종 34) 외종숙인 임권(任權)이 이홍인의 재질을 아껴 동지사로 명나라에 가면서 데리고 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군이 일도(一道)를 휩쓸자 사재를 기울여서 장정 3백여 명을 모아 구담(九潭, 현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에서 적을 막았다. 왜군들이 권몽삼(權夢參)이 지키던 다인(多仁)을 거쳐 강을 건너 구담으로 진격해 오자 의병들을 독려하여 방어에 나섰으며, 우두원(牛頭院)을 지키던 권전(權詮)마저 참패하자 대신 의병장을 맡아서 분전하였다.
이홍인은 1594년 왜구와 싸우다가 결국 진중에서 사망하였다. 이홍인의 증손인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은 특별히 보첩(譜牒)을 써서 이홍인의 활약에 대해 “공이 의병장으로서 구담에 주둔한 적을 막음으로써 적들이 안동을 범하지 못하였다.”라고 평가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정국(李楨國)이 가장(家狀)을, 류규(柳氵奎)가 행장을, 정종로(鄭宗魯)가 묘갈명을 지었다. 1811년(순조 11) 정충각(旌忠閣)이 내려지고, 영남충의단(嶺南忠義壇)에 봉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