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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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士誠 |
영어음역 | Jeong Saseong |
이칭/별칭 | 자명(子明),지헌(芝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만기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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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 |
성별 | 남 |
생년 | 1545년(인종 1) |
몰년 | 1607년(선조 40) |
본관 | 청주 |
대표관직 | 양구현감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지헌(芝軒). 아버지는 사섬시첨정 정두(鄭枓),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식(權軾)의 딸이다. 동생이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이다.
[활동사항]
정사성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 수학하였으며 10세 때는 구봉령(具鳳齡)에게 옮겨서 배웠다. 1561년(명종 16)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갔다. 당시 아버지 정두는 아들을 위해 직접 기숙사인 역락재(亦樂齋)를 지어 줄 정도로 자식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았다.
1568년(선조 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87년 태릉참봉에 제수되었다. 1589년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였다가 1591년 경주의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이 되었다.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시고 제천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영남으로 와서 임시로 예안의 백동서당(柏洞書堂)에 봉안하였다.
내자시봉사(內資寺奉事), 내섬시주부(內贍寺主簿)를 거쳐 1594년 양구현감으로 나갔다가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 힘썼다. 1596년 『역학계몽질의(易學啓蒙質疑)』를 썼고 이듬해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 가서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의병 활동에 가담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지헌집(芝軒集)』 4권 2책이 있다. 문집 중 「사훈차록(師訓箚錄)」은 스승 이황을 만나 학문을 배운 일과 그의 훈계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임진일기(壬辰日記)」는 1592년(선조 25) 4월 13일부터 7월 17일까지의 전란 상황을 기록한 일기이다. 「배수용피난사품보본도감사장(陪晬容避亂事稟報本道監司狀)」은 임진왜란 때 태조의 어진(御眞)을 피란시킨 경위를 관찰사에게 보고한 내용이며, 「도제천품보충청도감사장(到堤川稟報忠淸道監司狀)」은 태조의 어진을 모시고 제천에 당도하여 충청관찰사에게 구원을 요청한 내용이다. 기타 저술로 『역학계몽질의』가 있다.
[묘소]
묘소는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현리 부친의 묘소 오른쪽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31년(영조 7) 옥계서원(玉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그 뒤 철향되었다가 1779년(정조 3) 학암리사(鶴巖里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