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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568
한자 金舜欽
영어음역 Gim Sunheum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강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순국자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40년연표보기
몰년 1908년연표보기
본관 풍산

[정의]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이자 순국자.

[개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치화(穉華), 호는 죽포(竹圃)이다. 오미마을 허백당 김양진의 14세손으로, 1840년 풍산면 수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김순흠은 일찍부터 문명이 인근에 널리 알려져, 1894년 당시 경상감사 조병호(趙秉鎬)가 여러 차례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895년 말 전국적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 김순흠은 안동과 예천, 의성을 다니며 의병 모으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의병 해산의 조칙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열중하며 10여 년을 보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게 되자 넷째 아들 김낙문(金洛文)을 이강년(李康秊)에게 보내 의병 항쟁 대열에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을사오적의 매국 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의 유림들에게 배포하였으며, 의병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령이 내려지고, 해산 군인들이 의병 대열에 참가하면서 민긍호(閔肯鎬)·이강년 등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를 지원하고 나섰다. 그러나 거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죽음으로 항거할 의지를 드러낸 김순흠은 지난해의 곡식으로 목숨을 이어갔다. 이는 일본이 지배하는 땅에서 생산된 곡식은 먹지도 가꾸지도 않겠다는 의식적 항거였다.

지난해 곡식으로 목숨을 연명하던 김순흠은 1908년 9월 3일 드디어 단식에 들어갔다. 자식들의 만류가 간곡하였지만, 그는 “아비가 죽으면 자식의 망극한 슬픔은 상례이겠으나, 나의 의리는 태산같이 무겁고 죽음은 새털과 같이 가벼운 것이니 너희들은 나의 뜻을 거스르지 마라”고 하며 뜻을 꺾지 않았다.

또한 “내가 죽거든 빈소를 차려 곡(哭)은 하더라도 음식을 올리지는 말아라. 왜적이 이 강토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음식으로 제사하더라도 혼령이 있다면 반기지 않으리라”라고 단단히 일렀다. 왜적이 이 땅에 도사리고 있는 한 죽어서도 음식을 받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김순흠은 동년 9월 11일, 스스로 죽음을 애도하는 「자만시(自輓詩)」를 지었다. 이 「자만시」에는 의(義)를 위하여 음식을 끊었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밤낮으로 추앙하며, 사람의 시비(是非)와 죽고 사는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뜻에 따라 죽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1908년 9월 28일 김순흠은 예천군 감천면 진평동 깊은 골짜기에 있던 후손 김병욱(金秉旭)의 서실(書室)에서 향년 69세로 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죽포문집(竹圃文集)』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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