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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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淵福 |
영어음역 | Ryu Yeonbok |
이칭/별칭 | 차기원,성만,신와,유연복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한준호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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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
성별 | 남 |
생년 | 1890년 |
몰년 | 1965년 |
본관 | 전주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만(成萬), 호는 신와(愼窩)이며, 또 다른 이름은 차기원(車淇源)이다. 1890년(고종 27) 전주류씨 동성마을이었던,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류연복은 1907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에 설립된 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협동학교는 안동의 혁신 유림인 김대락(金大洛)·이상룡(李相龍)·류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이 참여하여 인재를 양성한 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었다. 1919년 고종의 죽음으로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펼쳐지자, 류연복은 이것을 기회로 나라를 되찾고자 1919년 3월 임동면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조국 광복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류연복은 김영기(金榮基)로부터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활동하고 있으나, 군자금이 부족하여 어려운 실정에 있음을 들었다. 이에 류연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간도독립단(間島獨立團) 발행의 공채(公債)를 가지고 고향인 안동에 돌아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펴다가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1920년 12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류연복은 다시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을 위해 손영학(孫永學)과 함께 1926년 2월 21일 영덕부호 조규한(趙圭漢)의 집을 찾아가 1만 원을 요구하다가 일제 경찰에 또다시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류연복은 1926년 10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2년에 건국포장을 받았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