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6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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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光民 |
영어음역 | Yi Gwangmin |
이칭/별칭 | 이문형(李文衡),이영형(李永衡),사익(士翼),자화(子華)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법상동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한준호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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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법상동 |
성별 | 남 |
생년 | 1895년 |
몰년 | 1946년 |
본관 | 고성 |
대표경력 | 정의부 민사부 서무과 주임위원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사익(士翼), 호는 자화(子華)이며, 또 다른 이름으로 이문형(李文衡)·이영형(李永衡) 등이 있다.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조카이다. 1895년(고종 32)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법상동에서 출생하여 1946년 사망하였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번지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묘가 있다.
[활동사항]
이광민은 1907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에 설립된 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협동학교는 안동의 혁신 유림인 김대락(金大洛)·이상룡(李相龍)·류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이 참여하여 인재를 양성한 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이었다. 대한제국이 무너지자 이광민은 큰아버지 이상룡을 따라 중국 길림성 유하현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졸업하였다. 1916년 이광민은 길림성 통화현 삼도구에 있는 동화학교(東華學校)에서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23년 8월 이광민은 반석현에서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여, 1924년 11월 창립총회에서 당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3월에는 전만통일회의주비회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하였고, 같은 해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가 발족되자 그는 민사부 서무과 주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1월 이광민은 정의부 중앙총부에서 내정과 외부 조직을 확장하려고 만주 각지와 국내에 위원을 파견하여 군인과 군자금을 모집할 때 김세준(金世俊)·김홍식(金鴻植) 등과 함께 파견되어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도·평안북도, 황해도 등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제3회 정의부 중앙의회에서 재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가을에는 조선공산당 남만총국 조직부 간부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7년 4월 15일 이광민은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조직을 위한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3부 통합 논의에 정의부 대표로 김동삼·오동진 등 11명과 함께 선임되어 길림현 신안둔에서 열린 제1회 각단체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 1927년 5월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이자 조선공산당 남만도 간부인 이광민은 휴간 중인 기관지 『농보(農報)』를 조선공산당 방침에 따라 5월 1일부터 다시 발행하였다.
1927년 9월에는 조선공산청년회 남만 제1구에서 선전부 간부에 임명되었다. 1928년 5월 이광민은 전민족유일당촉성회파(全民族唯一黨促成會派)인 여족공의회(麗族公議會)의 대표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 3월에는 전만한인반제국주의대동맹창립주비회(全滿韓人反帝國主義大同盟創立籌備會) 결성에 참여하여 김동삼 등과 함께 집행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