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6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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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趾完 |
영어음역 | Yun Jiwan |
이칭/별칭 | 숙린(叔麟),동산(東山),충정공(忠正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창현 |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숙린(叔麟), 호는 동산(東山). 증조부는 호조좌랑 윤엄(尹儼),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윤민헌(尹民獻), 아버지는 이조판서 윤강(尹絳), 어머니는 지돈녕부사 정광성(鄭廣成)의 딸이다. 형은 좌의정 윤지선(尹趾善)이다.
[활동사항]
윤지완은 1657년(효종 8) 통덕랑으로서 생원시에 합격하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설서, 사간원헌납, 홍문관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사헌부지평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했을 때 경연에서 당쟁의 폐단을 통박하였고 또 덕원으로 유배된 송시열(宋時烈)의 신구(伸救)를 건의하였다가 당시의 집권당인 남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기도 하였다.
1680년에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한 경신대출척으로 부교리에 등용되고, 부응교를 거쳐 경상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82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어영대장, 예조판서를 거쳐 1684년 경상도관찰사에 재임되었다. 1688년 병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같은 해 기사환국으로 송시열 등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함에 따라 유배되었다.
1694년에 폐비 민씨 복위운동과 관련된 갑술옥사를 계기로 소론이 다시 등용됨에 따라 의정부좌참찬과 우의정을 지냈다. 이듬해 영돈녕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안산으로 돌아왔다가 1704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1717년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숙종과 독대한 후 세자청정(世子聽政)의 명이 있자 80세의 노구로 관(棺)을 들고 한양에 올라와 이이명의 독대를 통박하고 세자청정이 아직 시기가 아님을 극언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에 있다가 경기도 개성 오관산으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