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7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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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宣王后 |
영어의미역 | Empress Inseon |
이칭/별칭 |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효숙대비(孝肅大妃),경렬명헌(敬烈明獻)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명우 |
[정의]
조선 후기 안산에서 활동한 왕후.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아버지는 조선시대 한문학 4대가 중 한 사람인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딸, 남편은 효종(孝宗)이다. 자녀로 현종(顯宗), 숙안공주(淑安公主), 숙명공주(淑明公主), 숙휘공주(淑徽公主), 숙정공주(淑靜公主), 숙경공주(淑敬公主) 등 1남 5녀를 두었다. 오빠가 장선징(張善徵)이다.
[활동사항]
인선왕후는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얌전하여 함부로 장난치며 놀지 않았으며, 여섯 살 때부터 할머니인 박씨(朴氏) 부인 밑에서 자랐다. 언니가 얼굴에 종기가 나 고생하는 것을 보고 어린아이의 오줌을 손수 발라주면서 싫어하는 기색이 없자 아버지 장유가 매우 기뻐하며 기특히 여겼다고 한다. 1630년(인조 8) 12세 때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처로 간택되어 다음해에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뒤 소현세자(昭顯世子), 봉림대군 등과 함께 인질로 잡혀가 8년 동안 심양(瀋陽)에 머물면서 현종을 낳았다. 1645년 소현세자가 죽고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자 세자빈이 되었지만 책봉을 받지 못하였다. 그 뒤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으며 2년 뒤 정식으로 책명을 받았다.
왕비로서 항상 근신하며 ‘안에서 스스로 잘난 체하면 가정이나 나라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며 스스로 항상 경계하였다. 효종의 병이 위중해지자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으며 승하한 뒤에는 예에 벗어날 정도로 곡을 하며 슬퍼하였으며 또 몸소 남편의 시신을 씻기고 손톱, 발톱을 자르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1661년(현종 2) 효숙(孝肅)이라는 존호를 받고 왕대비로 있다가 효종의 죽음으로 얻은 슬픔이 끝내 병으로 악화되어 1674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의 시어머니인 인조비(仁祖妃)가 상복을 1년 또는 9개월 입을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서인과 남인 간에 제2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이 벌어졌다.
[저술 및 작품]
딸과 오빠에게 보낸 한글 편지 70여 통이 전한다. 둘째딸 숙명공주에게 보낸 53통의 편지는 『숙명신한첩(淑明宸翰帖)』에 실려 있고, 셋째 숙휘공주에게 쓴 16통은 『숙휘신한첩(淑徽宸翰帖)』에 수록되었다. 내용은 대체로 안부를 묻는 것이지만 궁중의 풍속이나 정치 사건 등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편지에는 왕후가 중국소설의 언해를 다독한 흔적이 있어 중국소설의 언해 시기, 독자 현황, 부녀자와 국문소설의 관계 등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한편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오빠 장선징에게 보낸 편지는 『효종대왕재심양신한첩(孝宗大王在瀋陽宸翰帖)』에 전한다.
[묘소]
묘소는 영릉(寧陵)[사적 제195호]으로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있으며 앞뒤로 길게 뻗은 언덕에 효종릉과 쌍릉을 이루고 있다.
[상훈과 추모]
인선왕후가 죽자 휘호를 경렬명헌(敬烈明獻)으로 올리고, 시호를 인선(仁宣)이라 하였다. 1999년 5월 시흥문화원에서는 경기도 시흥시 장곡동 매꼴마을에 ‘조선시대 인선왕후가 살던 마을 유래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