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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754
한자 張維
영어음역 Jang Yu
이칭/별칭 지국(持國),계곡(谿谷),묵소(默所),신풍군(新豊君),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문충공(文忠公),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87년연표보기
몰년 1638년연표보기
본관 덕수
대표관직 의정부우의정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개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공신에 책봉되었고, 양명학자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정구(李廷龜) 등과 함께 4대 문장가로 알려져 있다.

[가계]

아버지는 판서를 역임한 장운익(張雲翼),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박숭원(朴崇元)의 딸, 처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동생이 장신(張紳)이며, 딸이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활동사항]

장유는 1605년(선조 38)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독서당에 들어갔고 이듬해 겸설서를 거쳐 검열, 주서 등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예문관대교를 거쳐 얼마 후 봉교로 승진하였으며, 다시 성균관전적으로 옮겼다가 예조좌랑이 되었고 4월 말에 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해 8월에는 지제교 겸 교서교리가 되었고, 9월에는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 지방을 관찰하였는데 지방 행정의 크고 작은 폐단들을 조목조목 세밀하게 관찰·보고하였다.

1624년 이후 대사성과 부제학을 네 번, 대사간과 대사헌을 다섯 번, 이조참판을 세 번씩이나 역임하면서 인조반정 뒤의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키며 조정의 중신으로 자리잡았다. 그 사이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발생하자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봉해졌다. 이후 이조판서를 비롯해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겸 지성균관사를 역임하고, 이어 의정부우참찬에 제수되었다.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구하다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1630년 사헌부대사헌을 시작으로 좌부빈객(左副賓客),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31년 인조가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려고 하자 조정은 이를 놓고 격론을 벌였고 장유 또한 추숭불가론의 입장을 밝혀 임금의 뜻에 반대하였다. 이때 장유는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왕에게 바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조판서로 최명길(崔鳴吉)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1637년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하였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장유는 천문, 지리, 의술, 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하였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학문과 사상]

장유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지만 주자학에만 빠져 있지 않고 일찍이 양명학(陽明學)을 접한 후 당시 주자학의 편협한 학문 풍토에 대하여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게 되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고 비판하였다. 또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면서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하여 진실을 인식하려고 하였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적극 수용하였다.

이식(李植)장유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고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지적하였으나 송시열(宋時烈)은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라고 하였다.

[저술 및 작품]

많은 저서가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계곡만필(谿谷漫筆)』, 『계곡집(谿谷集)』, 『음부경주해(陰符經注解)』가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산1-5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진봉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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