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1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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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道監司- |
영어의미역 | The Site to Rise to A High Positio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현우 |
성격 | 전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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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 | 아버지|8형제|딸|왕|중 |
관련지명 | 동막골 |
모티프 유형 | 무덤의 훼손|운이 다한 8형제 |
[정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에서 도감사 자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상황]
1989년 6월 2일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에서 조운학[남, 70]이 구연한 것을 최내옥·김용덕·신성원·안성진·박병제·조항심·김헌영이 채록하여 1989년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출간한 『한국학논집』에 수록하였다. 이후 1999년 안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안산시사』 중권에 재수록하였다.
[내용]
지금으로부터 200년인가 300년 전에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동막골에 아들 8형제와 딸 하나를 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딸을 제외한 아들 8형제를 불러 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죽으면 아무도 몰래 안산 동막골 뒷산에 묻어다오. 그러면 너희들 모두 감사가 될 것이다.” 그때 이 말은 엿들은 딸은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감사가 될 수 없어 오빠들한테만 얘기하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가 죽은 후 아들들은 그의 말대로 아버지를 동막골 뒷산에 묻었는데,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후 나라의 명부를 훑어보던 왕은 팔도의 감사가 한 사람의 자식임을 알고 놀랐다. 왕은 ‘만약 반란이 일어나 저들 8명이 합세할 경우 왕실이 바뀔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여 8형제의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기로 작정하였다.
왕은 산소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8형제를 잡아들여 인두로 지지고 몸을 찌르는 등 온갖 고문을 다하였으나 모두 모른다는 말뿐이었다. 그러자 왕은 못이 박힌 널빤지 위를 걷는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8형제는 발이 못에 찔려 피범벅이 되어도 끝내 산소의 위치를 말하지 않았다.
고심하던 왕은 8형제에게 여동생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녀마저 데려다 고문하였다. 그러나 그녀 또한 오빠들은 알지 모르지만 자기는 모른다고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왕은 그녀에게 못이 박힌 널빤지 위를 걸으라고 명하였다. 피범벅이 된 오빠들의 발을 본 여동생은 벌벌 떨었다. 그리하여 여동생은 왕에게 무덤의 위치를 말해 버렸다. “안산 동막골 뒷산에 묻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산소를 찾아내 파 보았지만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무덤은 그 아래의 연못과 통해 있어 물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였다. 그러자 왕은 시체가 연못에 있다고 생각하고 연못의 물을 퍼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물을 거의 퍼내었다 싶으면 별안간 비가 와서 다시 연못물이 가득하게 되었고, 다시 퍼내면 또 비가 와 가득하기가 반복되었다.
왕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지나가던 중이 왕에게 말하였다.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왕의 이야기를 들은 중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해서는 이 물을 다 퍼내지 못합니다.” 왕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은 “저 꼭대기에 가서 이곳만큼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입담배를 가득 채운 후 물을 퍼내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 일행이 그대로 하니 과연 물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물을 다 퍼낸 후 그 안을 보니 용이 안 된 이무기가 있었다. 왕은 이무기를 죽이고 8명의 감사를 역적으로 귀양 보냈다.
[모티프 분석]
「도감사 자리」의 주요 모티프는 ‘무덤의 훼손’과 ‘운이 다한 8형제’이다. 한 사람의 자식 8명이 모두 팔도 감사인 것을 이상히 여긴 왕이 그 아버지의 무덤을 파헤쳐 이무기가 있는 것을 발견하여 죽인 후 8명의 감사를 모두 귀양 보냈다는 이야기로, 권력의 집중을 우려하는 교훈이 담겨 있는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