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16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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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영어음역 | Cheonjugyo |
영어의미역 | Catholic |
이칭/별칭 | 가톨릭교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학 |
[정의]
경기도 안산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분파.
[개설]
본래 ‘보편적’, ‘공번된[공평한의 옛말]’이라는 말뜻을 갖고 있는 가톨릭은 2세기 초부터 사용된 이래 하나의 교회, 일치된 교회를 의미해 왔다. 그런데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가톨릭의 범주에는 동방정교회[그리스정교회]까지 포함되지만 오늘날 일반적으로 지칭되는 가톨릭은 로마의 교회, 즉 로마 가톨릭이다.
57년에 설립된 로마교회는 ‘베드로에 의해 창설된 교회’로서, 예수의 12제자 중 첫 자리[수위권]를 차지한 베드로는 초대 교황으로 로마 가톨릭의 정점을 이룬다. 베드로의 수위권이야말로 로마 가톨릭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이후 가톨릭은 분리된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보편적이라는 의미도 지니게 되었으며, 초기 교회 이후 수많은 이단 교리 논쟁을 거치면서 정통성을 유지했다는 정통 교회로서의 의미도 갖게 되었다. 2005년 현재 가톨릭교회는 전 세계에 약 11억 명의 신도를 가진 최대의 공번된 교회를 이루고 있다.
가톨릭의 우리말 호칭은 천주교(天主敎)이다. 이처럼 천주교라고 부르게 된 까닭은 서양인 선교사들이 가톨릭을 전파할 때 중국에서는 하느님을 천주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서양 선교사들이 천주교 교리를 한자어로 번역한 이후 동북아시아 한자문화권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천주교가 가톨릭을 지칭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에 처음 천주교가 전래될 때에는 서학, 천주학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개신교에 비해 오래되었다는 의미로 천주교를 구교, 개신교를 신교로 부르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구교라는 말보다 가톨릭·천주교·성당 등의 말이 일반화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래 및 변천]
1. 박해기
17세기 중국을 왕래하던 조선의 사신들은 당시 중국에 진출해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서양의 과학 기구와 각종 한역 서학서(西學書)들을 수집하여 귀국하였다. 이 책들은 사회 개혁에 관심이 많은 실학자, 양반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서 서학(西學)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일으켰다.
1784년(정조 8) 이승훈(李承薰)은 북경에 가서 영세를 받고 한국 교회 사상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귀국할 때 한역 서학서 및 많은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와서 이벽(李檗) 등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주변 친지들에게 전교하면서 신앙 공동체인 조선천주교회를 구성하였다.
천주교는 교세가 확장되면서 정부와 집권층 유학자들로부터 탄압과 박해를 받게 되었다. 최초의 큰 박해는 1791년(정조 15) 전라도에서 일어난 진산사건(珍山事件)이었다. 양반 천주교인 두 명이 조상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사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이후에도 간헐적인 천주교 박해는 지속되었다.
하지만 1830년대에 들어 외국인 선교사를 맞이하게 되면서 천주교 교세는 크게 확산되었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세가 확장되는 상황을 우려한 조선 정부는 1839년 대규모의 박해를 가했는데, 이른바 기해박해(己亥迫害)이다.
이러한 대규모 박해는 흥선대원군 집권기까지 지속되다가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에 이어 1886년(고종 23) 한불수호조약을 체결한 뒤에야 비로소 종식되었다. 조선 안에서 포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한불수호조약의 결과 조선 천주교는 이제 100여 년 동안의 모진 박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2. 도약기
신자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한국 천주교 교구는 조직의 확대와 정비에 착수하였다. 우선 원산, 제물포, 서울, 동래 등 개항지를 중심으로 본당(本堂)을 조직하는 데 힘을 쏟았다. 아울러 본당에 소속되는 공소(公所) 조직도 계속 확대해 나갔다. 그 결과 교구의 증설이 필요하게 되어 1911년 대구교구가 기존 조선교구에서 독립하였고, 그때까지 한국의 유일한 교구였던 조선교구는 서울교구로 개칭되었다.
한편 천주교 신자 수는 일제강점기 때 크게 둔화되었다가 1945년 광복 이후 다른 종교와 더불어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광복과 함께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결과이다. 1960년대 초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계기로, 천주교는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한편, 교회의 토착화 노력에도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70년대에 들어 한국 사회에서 천주교가 차지하는 위상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천주교의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국민들로부터 큰 신뢰와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특히 1980년대에 이루어진 천주교의 여러 활동은 한국 사회에서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81년 조선교구 설립 150주년 기념 대규모 신앙대회 개최, 1984년 한국 천주교 설립 200주년을 기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방문, 교황의 방문과 더불어 현지에서 거행된 한국 순교자 103명을 성인품(聖人品)에 올리는 시성식(諡聖式), 그리고 1989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된 제44차 세계성체대회 등은 한국 천주교의 성장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열려 큰 성공을 거둔 세계성체대회는 세계의 불화와 대립이 분단으로 상징 되는 한반도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해 주었다.
[조직 및 현황]
가톨릭교회는 각 지역마다 교구(敎區)라는 개별 공동체를 두고 있으며, 각 교구에는 교구장 주교를 중심으로 보좌주교·총대리·사무처 등의 조직을 갖추고 있다. 또한 각 교구 산하에 본당[성당]들이 있으며, 각 본당에는 교구장 주교를 대리한 주임신부를 중심으로 사목회장·사목협의회 등의 평신도 협의체가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의 교세는 꾸준히 성장하여, 2007년 말 현재 신자 수 약 488만 명에 이른다. 교구 수는 서울·대구·광주의 3개 대교구를 비롯하여 모두 19개[평양교구, 함흥교구, 덕원자치수도원구 포함], 본당은 1,511개소, 공소(公所)는 1,578개소이다. 성직자는 대주교 3명, 주교 26명, 한국인 신부 3,925명, 외국인 신부 191명이 사목 활동을 펴고 있다.
2007년 12월 현재 천주교 수원교구 안산대리구[대리구좌 성당=대학동성당] 산하 안산 1지구 소속 8개 본당, 안산 2지구 소속 8개 본당, 그리고 인천교구 산하 시흥안산지구 소속 대부동성당 등 총 17개의 본당이 있다. 신자 수는 41,817명이고, 대부동성당 관할 1개 공소[선감공소]가 있다.
[주요 활동사항]
안산 지역 내 천주교 복지 시설로는 성빈센트 안산분원[상록구 사동], 가톨릭여성상담소[상록구 사1동 대학동성당 내], 하상어린이집[대학동성당 내], 월피어린이집[장애아동 복지 시설, 상록구 월피동], 시립대덕어린이집[장애아동 복지 시설, 단원구 원곡동], 평화의 집[노인 복지 시설, 단원구 고잔1동], 소화의 집[노인 보호 시설, 단원구 선부동], 해동일터[장애인 복지, 상록구 사동], 명휘원[장애인 재활교육 시설, 상록구 사2동], 본오종합사회복지관[장애인 복지, 상록구 본오1동]이 있다.
관련 단체로는 마리스타 교육수사회[수도 단체 및 선교 단체, 상록구 사2동], 말씀의 선교 수도회[상록구 부곡동], 예수의 작은 형제회[원곡동], 사랑의 선교수녀회[단원구 고잔동], 설교자회[수련원, 상록구 일동], 와동 성모유치원[단원구 와동], 명혜학교[특수학교, 상록구 사2동]가 있다. 안산대리구 내에는 성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