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3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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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驛院制 |
영어공식명칭 | Station Guesthouse System |
이칭/별칭 | 역참제,역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범 |
[정의]
조선시대에 서울과 충청남도 아산 지역을 포함하여 지방을 연결하던 교통 및 통신 제도.
[개설]
역원(驛院)은 중앙과 지방, 지방과 지방 사이를 연결하여 공문서 전달, 관물 수송, 사신 왕래, 공무 출장자에게 편의 제공 등을 위해 도로의 중요 지점에 설치된 시설이다.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는 시흥역(時興驛), 창덕역(昌德驛), 장시역(長時驛)과 불장원(佛藏院), 요로원(要路院), 흥인원(興仁院), 명암원(鳴巖院), 마장원(馬場院), 용정원(龍頂院), 신례원(新禮院), 용두원(龍頭院), 대조원(大棗院) 등이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역(驛)은 공적 업무 수행을 위해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으로 공문서 전달, 출장자 지원 기능 이외에도 죄인 압송, 통행인 규찰과 유사시에는 국방 기능까지 담당할 목적으로 전국 주요 도로에 설치되었다. 원(院)은 역로망 유지, 운영을 보조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역을 이용할 수 없는 민간 여행객들이 이용 대상이었으며 숙식을 제공하여 여행객의 이동을 원할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원은 도로의 교차 지점이나 나루터, 고개 등 교통의 요충지에 주로 설치되었다.
[관련 기록]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역원 관련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읍지』, 『여도비지(與圖備志)』,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용]
『세종실록지리지』 「온수현조(溫水縣條)」에 "역이 하나이니, 시흥이다. 옛날에는 이흥(理興)이라 하였다.", 「신창현조(新昌縣條)」에 "역이 하나이니, 창덕이다.", 「아산현조(牙山縣條)」에 "역이 하나이니, 장시이다. 옛날에는 장세(長世)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각각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온양군조(溫陽郡條)」에 "시흥역은 옛날에는 이흥역이라 호칭했는데, 읍 남쪽 8리[약 3.2㎞] 지점에 있으며 승(丞)[관직명]이 있다.", 「아산현조」에 "장시역은 본현 북쪽 2리[약 0.8㎞] 지점에 있다.", 「신창현조」에 "창덕역은 본현 동쪽 3리[약 1.2㎞] 지점에 있다."라고 각각 기록되어 있다.
『신정아주지(新定牙州誌)』에는 "장시역은 현 동북 7리[약 2.8㎞]에 있다. 금정도(金井道)에 속한다. 타는 말이 10마리, 짐 싣는 말이 4마리, 역리가 31명, 역노가 21명이다. 불장원은 관아의 남쪽 6리[약 2.4㎞]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요로원은 관아의 동쪽 10리[약 4㎞]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흥인원은 관아의 북쪽 5리[약 2㎞]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라는 기록이 있다.
『신창현읍지』에 "창덕역은 현 동쪽 3리에 있다. 명암원은 현 동쪽 15리[약 6㎞]에 있다. 마장원은 현 동쪽 15리에 있다. 용정원은 현 남쪽 15리에 있다. 신례원은 현 서쪽 20리[약 8㎞]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온양군읍지』에 "시흥역은 군 남쪽 10리에 있다. 역마 11마리, 역노 8명, 역비 4명이다. 용두원은 관아의 남쪽 30리[약 12㎞]에 있다. 대조원은 관아의 동쪽 20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도비지』 「아산현 역도조(驛道條)」에 "장시역은 관아의 북쪽 2리에 있다.", 「신창현 역도조」에 "창덕역은 관아의 동쪽 3리에 있다.", 「온양군 역도조」에 "시흥역은 관아의 남쪽 8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각각 있다.
『대동지지』에 "장시역은 북쪽 2리에 있다. 창덕역은 동쪽 3리에 있다. 시흥역은 남쪽 8리에 있다. 옛날에 이흥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역은 삼국시대 때부터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전국적인 교통망의 형태를 보인 시점은 고려시대이다. 다만 아산 지역이 포함된 충청도 서부 지역은 고려시대에는 역이 거의 설치되지 않았다가 조선시대 태조~태종 연간 신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역로의 통행량과 중요도를 고려하여 대·중·소로 구별하였는데, 아산 지역의 역로는 소로에 해당하였다.
원은 어느 시점부터 설치되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고려 전기 불교 사원이 주도적 역할을 하여 설립, 운영이 활성화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계의 영향력 아래 있던 원은 15세기 지방관 통제에 놓이면서 국가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역과 원이 설치되었다는 것은 충청남도 아산 지역이 국가의 통치체제에 완전히 편입되었음을 상징한다. 충청도 서부 해안지역의 금정도, 시흥도(時興道), 이인도(利仁道)는 모두 소로에 속하지만 1896년 역원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그 기능을 잃지 않았던 만큼 교통과 육운, 관련 사건에 대한 많은 발굴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