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393
한자 城隍祠
영어공식명칭 Seonghwangsa Shrine
이칭/별칭 성황당,서낭당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면 중리3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강경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재지 성황제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면 중리3구 지도보기
성격 당집

[정의]

조선시대 충청남도 아산 지역 백성들의 안녕을 위하여 성황신을 모셨던 당집.

[개설]

성황사(城隍祠)는 조선 건국 후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산천(山川)·성황(城隍)·풍운(風雲)·뇌우(雷雨) 등 여러 명칭으로 부르던 민간신앙의 단(壇)들을 하나의 성황사로 통합하여 주(州)·부(府)·군(郡)·현(縣)의 행정단위마다 하나씩 설치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제사 지내게 하였다.

[변천]

조선 전기에 중앙집권화의 방편으로 조정에서 추진한 각종 지방 제의에 대한 정비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규정에서 그 전모를 찾아볼 수 있다. 규정에 따르면 산천·성황·풍운·뇌우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던 단들은 성황사에 수렴하여 재배치하였고, 대신 그동안 지방의 토호들이 장악해 온 성황사를 흡수하거나 정비하였다. 그러나 지방 토호가 여전히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러한 조처만으로는 기존의 풍속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었다. 즉, 지방 주도 세력이 교체되는 시기 또는 사족화(士族化) 하는 시기까지는 기존 풍속의 본질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 후기가 되면서 점차 민간화되기에 이르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황단(城隍壇)의 대부분이 후기적 모습이라 하겠다. 그중 온양군성황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연혁이 추기(追記)되어 있다. 1236년(고려 고종 23) 몽골의 군사가 와서 성읍을 포위하였는데, 아전(衙前) 현려(玄呂)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워 크게 격파하고, 적의 머리 2급(級)을 베었고, 화살과 돌에 맞아 죽은 자가 200여 명이나 되었으며, 노획한 군기도 매우 많았다. 고종은 성황신인 밀우(密佑)의 공이라고 생각하고 신호(神號)를 더 봉하였다.

1983년 발간된 『아산군지』에는 조선시대 때에도 계속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지금도 온양 연산(燕山) 상봉에 있는 큰 소나무 밑에 초막 1칸 당우(堂宇)[사당]가 있어 마을 사람들이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후기까지 성황사는 지방의 유력한 호족(豪族)이 제사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지방 호족은 조선 건국 후 향리층이 되거나 일부는 사족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온양의 성황사 사적에 몽골군을 격퇴했다고 기록된 현려는 가까운 아산현의 토성(土姓)으로 등장하는 현씨(玄氏)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성황사의 기록은 조선 전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온양 연산, 신창 서쪽 2리[약 0.8㎞], 아산 현의 동남쪽 5리[약 2㎞]"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다른 차이가 없다. "온양 연산(燕山)에 있고, 신창 관아의 서쪽 2리, 아산 관아의 동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황]

2003년 충청남도·충남발전연구원에서 발행된 『문화유적분포지도: 아산시』를 확인해 보면 2곳의 성황 제사가 기록되어 있다. 먼저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면 중리3구에서 지내는 성황제로 본래 성황단의 자리에 당집이 있었으나 새마을 사업으로 당집을 헐고 제단을 세웠다고 한다. 마을에 괴질이 있어 제를 지내기 시작한 후 마을이 편안해졌고, 그 후 매년 음력 정월 15일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읍내1리 신창학성(新昌鶴城)[학성산성(鶴城山城)] 내에 위치하고 있던 성황사 건물의 경우 일제강점기까지도 그대로 존속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당집은 조선시대 성황사의 맥을 이어 1990년경 민간에서 복원한 것이다.

[의의와 평가]

성황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나 연혁에 대한 자료의 고증이 없어 빠른 정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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