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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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倉-戰鬪 |
영어공식명칭 | Sinchang Hanti Pass Comba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홍구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50년 7월 10일 - 신창 한티고개 전투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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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50년 7월 10일 - 신창 한티고개 전투 종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2년 6월 25일 - 아산 경찰충혼탑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5년 12월 22일 - 6·25 참전경찰 동상 건립 |
발생|시작 장소 | 한티고개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산30번지 일대 |
종결 장소 | 한티고개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산30번지 일대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온양경찰서|예산경찰서|당진경찰서 |
[정의]
1950년 7월 10일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현 아산시 신창면] 한티고개에서 벌어진 경찰과 북한 인민군 간의 전투.
[역사적 배경]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 후 북한 인민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였고, 7월 6일 충청남도 천안까지 내려왔다. 북한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참전한 미군은 7월 8일까지 이틀간 천안에서 북한 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미군은 천안 방어선을 구축함과 동시에 주변의 남하 루트를 차단하였다. 충청남도 아산군에서는 7월 6일 배방면 봉강교와 온양읍 온천교를 폭파하여 천안에서 온양으로의 진입을 차단하였다. 그러나 북한 인민군은 7월 7일 경기도 평택에서 아산군 둔포면[현 아산시 둔포면]과 음봉면을 거쳐 7월 8일 저녁 온양읍에 들어왔으며, 7월 9일 송악면을 거쳐 공주군 유구읍, 7월 10일에는 신창면을 거쳐 예산군으로 향하였다.
[경과]
7월 7일 오전 북한 인민군이 평택에서 둔포면을 거쳐 음봉경찰서를 습격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온양경찰서 소속 경찰들은 예산경찰서로 이동하였다. 70여 명의 온양경찰서 소속 경찰들은 예산경찰서 소속 40명, 당진경찰서 소속 40명과 함께 북한 인민군의 예산군 진입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경찰 연합 병력은 7월 10일 온양경찰서 소속 경찰을 선두로 하여 아산군으로 들어오다 신창면과 도고면의 경계인 한티고개에서 북한 인민군을 만나게 되었고, 예산군으로의 진출을 막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과]
북한 인민군은 구소련제 무기를 앞세워 중무장한 상태였던 데 비해 경찰 연합 병력은 열악한 무기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경찰 연합 병력은 패하고 말았으며, 경찰 측에서 온양경찰서 이현종 경감 등 총 38명이 순국하였다. 북한 인민군은 이후 예산군, 홍성군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전투가 있었던 신창 한티고개에는 1982년 6월 25일 아산 경찰충혼탑이 세워졌고, 2015년 12월 22일 6·25 참전경찰 동상이 세워져 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경찰 연합 병력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북한 인민군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하지만 아산~예산~홍성~대천으로 이어지는 충청남도 서해안 지역은 미군의 작전지역과 거리가 멀었으며, 경찰도 무기 체계가 열악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결국 북한 인민군의 진출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