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5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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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顯忠祠遺墟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93[백암리 438-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민규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현충사 터를 알리기 위해 1906년에 세운 비석.
[건립 경위]
현충사는 이순신과 이완, 이봉상의 제향을 이어오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그 뒤 일제의 강압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며 지역 유림이 1906년 2월에 현충사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위치]
현충사 유허비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438-1에 있다. 현충사 주차장 서쪽의 충무교육원 경내, 당시 충무수련원이었던 충무교육원 바로 뒤 산기슭에 남아 있다.
[형태]
현충사 유허비는 화강석으로 비좌원수, 즉 네모난 비석 받침[비좌] 위에 머리 부분이 둥근 비신을 올린 형태로 세워져 있다. 높이 120㎝, 폭 45㎝이다.
[금석문]
현충사 유허비의 앞면에는 ‘현충사 유허비(顯忠祠遺墟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충무공 휘순신(忠武公諱舜臣), ‘강민공 휘완(剛愍公諱莞)’, ‘충민공 휘봉상(忠愍公諱鳳祥)’이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현충사 유허비는 1974년에 충무교육원을 건립하면서 원래 자리에서 수십미터 떨어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현충사 유허비 주변에는 과거 현충사 건물에 사용했던 장초석 등의 석재가 함께 있으며, 시멘트로 만든 난간을 둘러놓았다.
[의의와 평가]
현충사 유허비는 단순히 현충사 터였음을 알리는 차원을 넘어선 유적이다. 일제의 본격적인 국권 침탈 첫 단계라 할 수 있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이순신의 업적과 정신을 새롭게 강조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순신의 상징적 부활을 통해 위기에 처한 국권을 수호하고자 했던 당시 지역민의 의지와 민족의식을 보여주었던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