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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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鳳祥 |
영어공식명칭 | Lee Bongsang |
이칭/별칭 | 의숙(儀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병기 |
출생 시기/일시 | 1676년 - 이봉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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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02년 - 이봉상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06년 - 이봉상 삭주부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711년 - 이봉상 승지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25년 - 이봉상 형조참판으로 훈련대장과 금위대장을 겸임함 |
활동 시기/일시 | 1727년 - 이봉상 정미환국으로 의금부에 하옥됨|충청도병마절도사로 좌천 |
몰년 시기/일시 | 1728년 - 이봉상 이인좌의 난 때 반란군에게 붙잡혀 순절 |
추모 시기/일시 | 1728년 - 이봉상 좌찬성 추증, 충신 정려가 내려짐 |
추모 시기/일시 | 1731년 - 이봉상을 비롯해 홍림, 남연년을 기리는 삼충사·삼충사사적비 건립 |
묘소|단소 | 이봉상 묘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
사당|배향지 | 표충사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로53번길 9[수동 산6-11] |
성격 | 무관 |
성별 | 남 |
본관 | 덕수 |
대표 관직|경력 | 형조참판|금위대장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아산에 충신 정려가 세워진 무신이자 순절자.
[개설]
이봉상(李鳳祥)[1676~1728]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켜 청주를 함락하였을 때 투항을 거부하고 죽었다. 이때 비장(裨將) 홍림(洪霖),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도 함께 죽었다. 당시 충청감영에 들어온 이인좌가 항복할 것을 권하였지만 충무가(忠武家)의 충의(忠義)를 내세워 끝내 굽히지 않았다 한다.
[가계]
이봉상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의숙(儀淑)이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5대손이다.
[활동 사항]
이봉상은 1702년(숙종 28) 무과에 급제하고, 1706년(숙종 32) 삭주부사를 거쳐 1711년(숙종 37) 승지(承旨)에 올랐다. 경종 연간에 포도대장,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삼도수군통제사, 총융사(摠戎使),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 1) 형조참판으로 훈련대장(訓鍊大將)과 금위대장(禁衛大將)을 겸임하였다. 이때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의 죄상을 논박하였다가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 때 이광주, 조태억 등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자 의금부에 하옥되었다가 좌천되어 충청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728년(영조 4)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켜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성에 진입하였을 때 민간에 소문이 무성하였으나, 이봉상이 이를 믿지 않고 대비를 소홀히 하였다. 밤에 이봉상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반란군이 돌입하자 기생 월례(月禮) 및 비장 양덕부(梁德溥)가 성문을 열어 주었다. 이봉상이 침상 머리의 칼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반란군이 이봉상을 끌어내 칼로 위협하였다. 이봉상이 크게 꾸짖기를 "너는 충무공 집안에 충의가 서로 전해져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느냐?" 하고 크게 세 번 외치니 마침내 죽였다.
[묘소]
이봉상의 묘소는 1910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로 이장되었다. 이봉상 신도비가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에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1728년 어사(御史) 이도겸(李道謙)이 청주로부터 돌아와 이봉상의 순절을 전하자, 영조가 충정을 가상히 여겨 정려(旌閭)를 세우고 좌찬성에 추증하였다. 뒤에 헌종이 청주에 표충사(表忠祠)[삼충사(三忠祠)]를 세워 이봉상과 함께 순절한 남연년, 홍림의 위패를 모셨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