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6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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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鉤 |
영어공식명칭 | Kim Gu |
이칭/별칭 | 직지(直之),송정(松亭),귀산(歸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교빈 |
출생 시기/일시 | 1381년 - 김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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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39년 - 김구 한관 보임 |
활동 시기/일시 | 1441년 - 김구 눈병 치료차 온양온천 방문 |
활동 시기/일시 | 1446년 - 김구 종학박사 충원에 관한 상소를 올림 |
활동 시기/일시 | 1448년 - 김구 판종부시사에 임명되어 김문과 함께 『사서언해』 편찬, 궁궐 내 불당 설립 반대 상소를 올림, 상주목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454년 - 김구 불당 혁파 상소를 올림 |
활동 시기/일시 | 1459년 - 김구 김석제와 함께 진법 연구, 조규와 함께 아산현 복현을 청함 |
활동 시기/일시 | 1460년 - 김구 최항, 최인지 등과 『손자주해』 정리 |
활동 시기/일시 | 1462년 - 김구 고신 삭탈 |
몰년 시기/일시 | 1462년 - 김구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65년 - 아산현 복현 |
묘소|단소 | 김구 묘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구성리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대표 관직 | 예문관제학|중추원지사 |
[정의]
조선 전기 아산현의 복현에 힘쓴 문신.
[개설]
김구(金鉤)[1381~1462]는 1416년(태종 16) 문과 친시(親試)에 급제하여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이 된 뒤 세종, 단종, 세조에 걸쳐 홍주판관(洪州判官), 사간원(司諫院)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집현전부제학(集賢殿副提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중추원지사(中樞院知事) 등을 지냈다. 특히 성균관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경학(經學)에 뛰어났다.
[가계]
김구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직지(直之), 호는 송정(松亭)·귀산(歸山), 시호는 문장(文長)이다.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김광수(金光粹)의 아들이며, 자식으로 김종안(金終安)이 있었으나 먼저 죽었다. 충청남도 아산에 낙향 후 김구의 후손들이 아산김씨(牙山金氏)의 시조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출생 시기와 관련하여 1391년(고려 우왕 7)이라는 설도 있고, 1393년(고려 우왕 9)이라는 설도 있는데, 『아산인물록』에 기록된 1391년을 따랐다.
[활동 사항]
김구는 대사성(大司成) 윤상(尹祥)의 문인으로 1416년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1435년(세종 17) 종학박사(宗學博士)에 제수된 이래 성균관에서 가르치는 일에 종사한 시간이 많았다. 1439년(세종 21) 눈병이 심해 사직하려 했지만 종친인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 등 19인이 임금에게 아뢰어 한관(閒官)에 보임되었고, 1441년(세종 23)에는 임금의 명을 받아 온수(溫水)에 가서 그 물로 눈병이 치료되는지를 시험하였다.
외직으로는 1448년(세종 30) 상주목사를 지냈지만, 대부분 내직으로 근무하면서 『사서언해(四書諺解)』, 『초학자회(初學字會)』, 『손자주해(孫子註解)』 등의 한글 번역에 참여하였고, 1459년(세조 5)에는 군기부정(軍器副正) 김석제(金石梯)와 함께 새로운 진법(陣法)을 연구하였다.
1446년(세종 28)에는 종학박사가 다른 관직을 겸하는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성균관의 실직(實職)과 집현전의 녹관(祿官)에서 각 절반씩 뽑아 종학박사를 충원하자는 상소를 올려 임금의 허락을 받았다. 독실한 성리학자였던 김구는 1448년 궁궐 내 불당 설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불당이 만들어진 뒤로도 1454년(단종 2) 불당 혁파 상소를 올렸다. 성격 또한 강직해서 사간(司諫)을 맡고 있을 때에는 종친의 고신(告身)[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에 서명을 거부하여 좌천당하였다. 단종 때에는 일시적으로 관직을 놓고 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구성1리인 귀산(歸山)에 내려와 오교대(五敎臺)를 짓고 인재를 양성하였다.
1459년 재물을 탐한 죄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정난공신이었던 충청도관찰사 황효원(黃孝源)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아산현이 폐지되면서 온양군, 신창현, 평택현으로 나누어 배속되자 아산 출신의 현감(縣監) 조규(曺圭)와 함께 아산현의 복현(復縣)을 청했다가 1462년(세조 8)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고신을 삭탈당했다. 그 뒤 한 달도 못 되어 사망하였지만 사정을 딱하게 여긴 세조가 고신과 과전(科田)을 돌려주었다. 1465년(세조 11) 병 치료를 위해 온양온천에 온 세조에게 조규 등이 다시 상소를 올려 아산현이 복현이 되었으니, 김구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학문과 저술]
1448년(세종 30)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맡아서 김문(金汶)과 함께 사서를 한글로 번역한 『사서언해』를 편찬하였다. 1460년(세조 6)에는 최항(崔恒)·정인지(鄭麟趾) 등과 『손자주해』를 다듬고 정리하였다. 경사(經史)에 밝고 주자학에 정통하였으며, 성균관에서 후진 교육에 큰 힘을 보탠 까닭에 김말(金末), 김반(金泮)과 더불어 ‘경학삼김(經學三金)’ 또는 ‘관중삼김(館中三金)’이라 불렸다. 문집으로는 『귀산김선생실기(歸山金先生實記)』가 전해진다.
[묘소]
김구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산정리에 있었으며, 나라에서 내려준 사패지지(賜牌之地)가 지금까지 전한다. 김구의 묘소는 후손들이 납골묘를 만들면서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구성리로 옮겨졌다.
[상훈과 추모]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에 있는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하는 논의가 있었지만 실행되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