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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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鑊 |
영어공식명칭 | Kwon Hwak |
이칭/별칭 | 사중(士重),석계(石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명진 |
출생 시기/일시 | 1568년 - 권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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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3년 - 권확 식년시 진사 3등으로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611년 - 권확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권확 정언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32년 - 권확 좌부승지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33년 - 권확 동부승지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권확 벼슬에서 물러나 아산의 농장에 머묾 |
몰년 시기/일시 | 1638년 - 권확 사망 |
출생지 | 서울특별시 |
거주|이주지 | 거주지 -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안동 |
대표 관직|경력 | 동부승지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아산에 거주하였던 문신.
[개설]
권확(權鑊)[1568~1638]은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넣어도 된다고 평가받았던 권절(權節)의 후손으로 인조 대에 활약했던 학자이다. 1636년(인조 14) 벼슬에서 물러나 아산 공세리 농장에 머물렀다.
[가계]
권확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중(士重), 호는 석계(石溪)이다. 할아버지는 권윤희(權胤禧), 아버지는 권결(權潔)이며, 어머니는 김사근(金思謹)의 딸이다. 아들은 권령(權坽)과 권우(權堣)이다.
[활동 사항]
1603년(선조 36) 식년시(式年試)에 진사 3등으로 입격(入格)하였다. 1611년(광해군 3)에는 별시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에 의해 무산되었다가 뒤에 복직되었다. 광해군 말엽 후금과의 미묘한 관계로 평안도가 소란할 때에 평안도독운사(平安道督運使)의 종사관을 지냈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언(正言)이 되었고, 1632년(인조 10)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다음 해인 1633년(인조 11) 동부승지(同副承旨)[승정원(承政院)에 속한 정3품 관직]가 되었다. 1636년 벼슬에서 물러나 아산의 농장에 머물다 1638년(인조 16) 사망하였다. 『승정원일기』 63책, 인조 16년 1월 15일 기묘에 "권확은 말년에 풍병(風病)을 앓다가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권확은 김세렴(金世濂)과 교류가 있었다. 김세렴의 『동명집(東溟集)』 제5권에 권확의 죽음에 관한 시가 있다.
승지 권확에 대한 만시[권승지확만(權承旨鑊挽)]
입직하던 은대 보면 아득 높았고[입직은대준(入直銀臺峻)]
걱정 나눈 붉은 인끈 새로웠었네[분우자수진(分憂紫綬新)]
하동 같은 고굉군을 맡았었으며[하동고굉군(河東股肱郡)]
대궐에선 조아 같은 신하였었네[금달조아신(禁闥爪牙臣)]
채복 입은 어진 아들 보았거니와[채복간현윤(彩服看賢胤)]
저 하늘이 선인에게 복을 준 거네[창천여선인(蒼天與善人)]
잔치에 가 옥 술잔을 잡았었거니[옥치도수석(玉巵叨壽席)]
그때 그 일 생각나서 눈물 나누나[추억습의건(追憶濕衣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