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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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鳳祥神道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8[삼거리 산2-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민규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에 1746년 건립된 충민공 이봉상의 신도비.
[개설]
이봉상(李鳳祥)[1676~1728]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5대손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의숙(儀叔),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1702년 알성시 병과에 급제하여 삼도수군통제사,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1725년(영조 1) 정미환국 때 어영대장에서 충청병마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청주성에서 숙부 이홍무(李弘茂)와 함께 반란군에 맞서다 체포되었다. 이인좌가 항복을 권유했지만, 이봉상은 이순신의 후손으로서 충무가(忠武家)의 충의를 지키며 끝내 순절하였다. 이런 사실을 보고받은 영조는 충신 정려를 세우게 하고 좌찬성에 추증하였다. 충민공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현충사에 추향되었다. 현충사는 1868년 철폐되었다가 1932년 중건되었으나, 1967년 새로 건립할 때 충민공 이봉상은 배향에서 제외되었다.
[건립 경위]
이봉상은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의 어라산(於羅山) 선영(先塋)에 안장되었으며, 신도비는 1746년(영조 22) 선영 입구 충무공 이순신의 신도비 곁에 건립되었다. 비문(碑文)은 이재(李縡)가 짓고 민우수(閔愚洙)가 썼으며, 전자(篆字)는 유척기(兪拓基)가 썼다.
[위치]
이봉상 신도비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산2-1번지, 어라산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산줄기의 끝자락에 서 있다. 이충무공의 묘역 입구 이순신 신도비 옆에 나란히 서 있다. 음봉면 소재지인 삼거리의 음봉사거리에서 북서쪽으로 400m 정도 지점의 길[고룡산로]가에 있다.
[형태]
이봉상 신도비는 네모난 비석 받침[비좌] 위에 비신[몸돌]과 지붕돌[개석]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비석 받침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18세기 특유의 모습이다. 비신은 앞뒤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신 상단에는 ‘충신 충청도병마절도사 증좌찬성 시충민이공 신도비(忠臣忠淸道兵馬節度使贈左贊成諡忠愍李公神道碑)’라는 전서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비제(碑題), 찬서자(撰書者), 비문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돌은 팔작지붕 형태의 정연한 작품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등이 높게 조각되고, 하단에 조각된 수평 부재 및 추녀 등은 18세기 최고 수준의 작품이다.
장방형의 화강암 대좌 높이는 37㎝, 너비 183㎝, 폭 123㎝이고 비신은 높이 238㎝, 너비 115㎝, 폭 48㎝이며, 총 높이는 349㎝이다.
[금석문]
충신 충청도병마절도사 증좌찬성 시충민이공 신도비(忠臣忠淸道兵馬節度使贈左贊成諡忠愍李公神道碑)
[현황]
이봉상의 묘소는 어라산 남쪽 산 능선에 조성되었는데, 1910년경에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로 이장되었으나 신도비는 그대로 남겨져 있다. 이봉상 신도비 동쪽에 서 있는 이순신 신도비에는 비각이 설치된 데 비해 이봉상의 신도비에는 비각이 없지만, 보존 상태는 양호하며 주변도 잘 정비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이봉상 신도비는 화려하지 않으나, 엄정한 모습으로 18세기 신도비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이봉상 신도비를 찬서한 사람이 당시 노론의 중심 인물이어서 이봉상의 정치 성향도 노론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이봉상은 소론을 배척했으나 소론이 주도한 정미환국(丁未換局)[1727년(영조 3) 노론과 소론의 극심한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소론이 정계에 복귀하도록 정국의 인사를 개편한 일]으로 좌천되었으며, 소론이 일으킨 이인좌의 난으로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