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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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烈女平山申氏旌閭 |
영어공식명칭 | Monument for Virtuous Woman Pyeongsan-Sinssi(Yeollyeo Pyeongsan-Sinssi Jeongnyeo)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228-4[아산리 67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서정수 |
건립 시기/일시 | 1848년 - 열녀 평산신씨 명정이 내려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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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851년 - 열녀 평산신씨 정려 건립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6년 3월 7일 - 열녀 평산신씨 정려 아산시 향토문화유산 지정 |
훼철|철거 시기/일시 | 2018년 4월 - 열녀 평산신씨 정려 철거 |
원소재지 | 열녀 평산신씨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228-4 |
성격 | 정려 |
양식 | 겹처마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관리자 | 고진상[영인면 아산3리] |
문화재 지정 번호 | 아산시 향토문화유산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있는 열녀 평산신씨의 조선 후기 정려.
[개설]
열녀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아산 고을의 관리였다고 전해지는 고세진의 부인이다. 평산신씨는 어릴 때부터 유순하고 영특했으며 결혼한 후에도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집안의 화목에 정성을 다하였다. 하인들도 사랑으로 대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남편이 병이 들어서 위독해지고 신씨의 극진한 간병과 간절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상을 떴다. 평산신씨는 남편의 시신을 염한 뒤에 슬픔을 누르지 못하고 사람들이 잠든 틈에 남편의 허리띠로 목을 매어 자살하니 당시 나이 28세였다. 이에 고씨 문중과 고을 선비들이 평산신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마침 아산 지방에 내려온 어사에게 보고하여 1848년(헌종 14)에 열녀 명정(命旌)을 받아 1851년에 정려를 세웠다.
[위치]
열녀 평산신씨 정려는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있었다. 영인면 행정복지센터 앞에서 북서쪽으로 160여m 지점의 버스정류장 부근 사거리에서 남쪽의 옛 시장길[아산리길]로 접어들어 30m쯤 간 뒤 오른쪽 샛길을 따라 45m 되는 지점 오른쪽 길가에 열녀 평산신씨 정려가 있었다. 2018년 4월 기준으로 철거된 상태이다.
[변천]
열녀 평산신씨 정려의 건립 이후 변천 과정은 확인되지 않는다. 근래 어느 시기에 목재 홍살 대신 철제 살이 설치되었고 그 이후 좁은 옛길 옆의 민가 사이에 반파된 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형태]
열녀 평산신씨 정려는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인 단칸이며 익공식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었다. 대지 위에 막돌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사방 벽면은 홍살을 철제로 설치하였으며 하방 이하는 시멘트 벽으로 이루어졌다. 정려 안에는 중앙으로 명정 현판이 있으며, 그 아래로 정려비가 세워져 있었다. 명정 현판은 가로 150㎝ 세로 25㎝의 크기에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열녀 평산신씨지려 당우신해명정(烈女平山申氏之閭 當宇辛亥銘旌)’이라고 쓰여 있다.
정려비는 방형의 대좌 위에 윗부분이 둥근 원수(圓首)의 비신을 세웠다. 비신은 폭 31.5㎝, 높이 75㎝, 두께12.5㎝로 전면에 ‘열녀신씨정려비(烈女申氏旌閭碑)’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의 글씨는 많이 훼손되었으며 식별할 수 있는 내용으로 "헌종무신○정려○○팔월건(憲宗戊申○旌闔○○八月建)’이라고 새겨져 있어 명정 연도와 건립 연대를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은 조선 전기의 정려 양식을 이어받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황]
열녀 평산신씨 정려는 심하게 파손된 상황이었는데, 아산시에서 2018년 4월 철거한 상태이며 인근 지역으로 이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열녀 평산신씨 정려는 당시에는 정려를 세우며 기리고자 했던 평산신씨의 열행에 관하여 현재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게 하는 유적이다. 더불어 수십 년 동안 파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던 아산 지역 문화유산에 대한 체계적 관리의 필요성을 말해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