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1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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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將軍-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동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진희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97년~2000년 - 「장군바위」가 수록된 『온양아산 마을사』 관련 자료 조사,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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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0년 12월 - 「장군바위」 『온양아산 마을사』 제1권에 수록 |
관련 지명 | 장군바위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동화리 서봉골 |
성격 |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이 진사|부인|이 진사 아들|며느리 |
모티프 유형 | 개과천선|권선징악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동화리 서봉골 뒷산에 있는 바위에 얽힌 이야기.
[개설]
「장군바위」는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동화리에 살았던 이 진사의 아들 이야기이다. 이 진사의 아들은 생애 초반에는 못된 짓만 일삼다가 뒤늦게 깨달음을 얻어 죄를 뉘우치고 마을을 위난에서 구해 민중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이 진사의 아들은 결국 자신의 부모와 처를 잃고 뒤늦게 후회하였으며, 홀로 아들을 키우며 고독하게 살다가 죽었다.
[채록/수집 상황]
「장군바위」는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조사 수집된 내용을 토대로 2000년 12월 온양문화원에서 발간한 『온양아산 마을사』 제1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동화리에 이 진사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진사는 덕성 있고 가문까지 좋아 주변의 존경을 받았으나 고민이 있었다. 이 진사의 아들은 나이가 18세가 되도록 어린애 짓만 하는 철부지였다. 이 진사 내외는 아들이 결혼하면 철이 들까 하여 수곡이란 동네의 김 첨지 맏딸과 자기 아들을 정혼시켰다. 그런데 이 진사 내외의 생각과 달리 아들은 날이 갈수록 난폭해졌다.
이 진사의 아들은 결혼하고 처음 몇 달은 그렇게 좋아하더니만 이내 아내를 미워하고 술주정을 부리고, 심지어는 몽둥이로 색시를 때려 반죽음에 이르렀다. 이 진사 내외는 점점 배가 불러오는 며느리에게 혹시라도 나쁜 일이 생길까 며느리를 친정으로 피신시켰다. 그런데도 이 진사 아들의 행실은 날이 갈수록 난폭함이 더해 갔다. 결국 이 진사 내외는 아들의 앞날이 걱정되어 몸져눕고 말았다.
포악했던 아들도 색시가 사라져 버리자 매일 낮잠으로 세월을 보냈다. 저녁 무렵 꿈속에서 아들의 색시가 아기를 안고 울고 있었다. 꿈에서 깬 이 진사의 아들은 색시가 보고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색시를 찾으러 갔다. 하지만 이 진사의 아들이 나가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해 집에서는 야단이 났다. 이 진사의 아들은 달빛도 없는 캄캄한 밤길을 색시를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어려운 줄도 모른 채 계속 발을 내디뎠다.
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어느 연못 앞에서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이 진사의 아들이 앉아 있는 곳은 동네에서 멀리 바라다보이는 산봉우리에 있는 바위가 있는 곳이었다. 이 진사의 아들은 그렇게 힘들게 온 길이 겨우 여기까지였다는 생각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 연못에서 좀 높은 곳에 있는 바위에서 흰 수염에 묵도를 한 노인이 흰 수염을 날리며 다가왔다. 노인은 말했다. "지금은 평화스러운 저 동네가 일 년 후에는 큰 도적 떼가 쳐들어올 걸세." 노인은 자신의 후계자로 진사 아들을 선택하여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게 한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이 진사의 아들은 무술을 익히겠노라고 노인에게 말했다. 그날부터 이 진사 아들은 무예를 익혔다. 그 사이 집에서는 며느리가 친정에서 출산을 하고 시가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는데 아들이 나간 뒤로 며느리의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빈곤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 진사의 부인은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렸다. 아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 년이 지났다. 흰 수염의 노인은 저녁에 도술을 끝낸 뒤 이 진사 아들에게 말했다. "내일은 지금까지 익혀온 도술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할 날일세." 드디어 날이 밝았다. 흰 수염의 노인은 "오늘 잘 싸워주게."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진사의 아들이 동네에 다다랐을 때 도적 떼들은 동네를 벌집 쑤셔 놓은 듯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를 본 이 진사의 아들은 도적 떼들에게 달려들어 혼자서 도적 떼 50여 명과 싸워 모두 물리쳤다.
이 진사의 아들이 도적 떼를 물리치고 오는데, 어느 죽은 부인의 가슴에서 한 아기가 울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부인은 자신의 아내였고 울고 있는 아기는 자기 아들이었다. 이 진사의 아들은 부모와 부인의 장례를 뒷산에서 간단히 치르고, 울고 있는 아기를 안고 말에 올라 단숨에 바위에 올랐다. 이 진사의 아들은 마지막으로 피비린내 나는 동네를 뒤돌아보고 아기를 안은 채 눈물을 흘리며 지난날을 후회하였다. 바로 이 진사의 아들이 회한의 눈물을 흘렸던 그 자리는 지금도 남아 ‘장군바위’라고 부른다. 그 후 이 진사의 아들은 아들을 데리고 산속 깊이 들어가 무예와 도술을 연마하여 일생을 고독하게 마쳤다. 그리고 이진사의 아들은 아버지가 죽은 뒤 세상에 나와 정의를 위해 백성을 보살피며 살았다. 지금도 서봉골 뒷산에 가면 이 진사의 아들이 늘 올라가 서 있던 바위에 장군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모티프 분석]
「장군바위」는 개과천선이 모티프이다. 이 진사의 철부지 아들은 개과천선하여 세상을 구원할 힘을 얻었으나, 뒤늦은 후회와 반성을 하며 고독한 삶을 살았다. 이는 인과응보의 전통적 가치관을 보여 준다. 충청남도 아산의 전설 중 바위를 대상물로 하는 전설은 30여 편으로 가장 널리 분포한다. 이는 크고 작은 산이 많은 아산의 지형적 특징이 반영된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