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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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潤孫 |
이칭/별칭 | 홍조(弘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의 광주 안씨 입향조인 조선 전기 문신.
[개설]
안윤손(安潤孫)[1450~1520]은 전라우도(全羅右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형조참의(刑曹參議),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등을 지낸 청백리이다. 아들 안자문(安子文)이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보령으로 낙향하여 광주 안씨의 입향조가 되었다.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홍조(弘祖)이다. 참찬 안성(安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섬시령(司贍寺令) 안철산(安鐵山), 아버지는 현감 안극변(安克辨)이다. 어머니는 사성 김최(金最)의 딸이다. 부인은 순천 김씨 김원석(金元石)의 딸이다.
[활동 사항]
안윤손은 1474년(성종 5) 생원·진사시에 잇따라 입격하고 147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당시의 방목(榜目) 기록에는 거주지가 기재되지 않았다. 문과 급제 후 2년 만인 1478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이어서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한명회(韓明澮)[1415~1487]가 남효온(南孝溫)[1454~1492] 등 재야 사림(士林)을 비방 탄핵하려 하자 이를 변호하였다.1482년 검토관(檢討官)으로 경연(經筵)에 참여하면서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봄에 꾸어 준 곡식에 대하여 가을에 그 절반을 이자로 쳐 받는 변리]의 혁파를 건의하였다. 이듬해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가 되어 왕명을 받고 궐군(闕軍)[병역(兵役)의 복무에서 빠진 군정]을 적발하고, 곧 이어 전주에 내려가서 수령의 불법 행위와 교육 현황을 조사, 감독하였다.
1484년 지평(持平)이 되어 안주판관 이빈(李濱)의 비행을 고발하여 처벌하고, 충청도관찰사 이공(李拱)이 무능하다고 탄핵, 체직시켰다. 그 뒤 장령(掌令)이 되어 언론의 창달과 기강 확립에 힘쓴 뒤 1494년 회령통판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1500년(연산군 6) 전라우도 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때마침 침입해 온 왜구를 막지 못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복직되어 1502년 사간원대사간을 지냈다. 이듬해 형조참의가 되어 청백리로 이름이 났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한성부우윤과 좌윤을 지내고 1507년(중종 2) 대사헌에 이르렀다. 그 뒤 함경도절도사(咸境道節度使)·한성부좌윤을 역임하고, 1512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1519년 아들 안자문이 기묘사화 이후 관직을 버리고 충청도 보령으로 낙향하면서, 보령 지역 광주 안씨의 입향조가 되었고,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보령 광주 안씨 집안은 안윤손의 고손자 안대진 관련 고문서를 다량 소장하고 있었는데, 2016년에 이 고문서를 보령박물관에 기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