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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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大進 |
이칭/별칭 | 면재(沔齋),퇴지(退之),우재(于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561년 - 안대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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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5년 - 안대진 알성문과 및 중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0년 - 안대진 승문원 근무 |
활동 시기/일시 | 임진왜란[1592~1598년] - 안대진 접반사(接伴使)의 종사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96년 - 안대진 이몽학의 난 진압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 안대진 계금장군청덕비 건립 |
몰년 시기/일시 | 1605년 - 안대진 사망 |
출생지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소황리 |
수학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
묘소|단소 | 안대진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소황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광주 |
대표 관직 | 춘추관 제학|홍문관 제학|세자시강원 좌부빈객 |
[정의]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조선 후기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공신.
[개설]
안대진(安大進)[1561~1605]은 조선 후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군 접대와 승문원(承文院) 외교 문서 작성에 공을 세우고,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에 들어온 명나라 구원군의 접대를 위해 계금장군청덕비(季金將軍淸德碑)를 세웠다.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호는 면재(沔齋), 자는 퇴지(退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형조참판을 지낸 안윤손(安潤孫)[1450~1520]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안자문(安子文), 할아버지는 안사탁(安士擢), 아버지는 안공필(安公弼)이다.
[활동 사항]
안대진은 고조할아버지 안자문이 조광조(趙光祖)[1482~1519] 사건에 연루되어 충청도 남포[현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일대]로 입향하면서 지금의 웅천읍 소황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586년(선조 19) 알성시(謁聖試) 문과에서 병과 5위로 급제하였으며, 같은 해 중시 문과에서도 병과 1위로 급제하였다. 문과방목(文科榜目)의 거주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문과 급제 후 주로 외교 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에서 근무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의주로 피난가는 선조(宣祖)[재위: 1567~1608]를 호종(扈從)하고, 조정에서 명에 구원을 요청하였을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1549~1598]의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1561~1613]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외교 문서 작성에 공을 세웠다. 1596년(선조 29) 임진왜란 중에 이몽학(李夢鶴)[?~1596]이 주동이 되어 충청도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산현감으로서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안대진은 호조정랑(戶曹正郎)·호조좌랑(戶曹佐郎)·해운판관(海運判官) 등을 지냈는데, 문장력이 매우 뛰어나 왕의 교서를 담당하는 지제교(知製敎)를 겸직하였다. 충청수영이 있던 보령 오천은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구원군으로 수군 3천 명이 들어왔던 곳으로, 명군을 접대하기 위해 인솔 장수인 계금(季金)을 칭송하는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그 비석이 현재 남아 있는 계금장군청덕비이다. 이 비석의 비문도 안대진이 지었다.
춘추관과 홍문관의 제학(提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좌부빈객(左副賓客) 등의 관직을 거쳤고, 44세에 사망하였다.
이수광(李睟光)[1563~1628]의 문집 『지봉집(芝峯集)』에 「과안퇴지구거(過安退之舊居)[안퇴지의 옛집을 지나며]」란 시가 있는데, 안대진과 가깝게 지냈던 이수광이 안대진이 사망한 후 안대진의 집 앞을 지나며 애도하는 마음을 노래한 글이다. 안대진의 후손들은 충청남도 보령시와 충청남도 홍성 지역에 세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소황리 서오개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 중의 공으로 선무(宣武)·호성(扈聖)·청난(淸難) 등 3개 부문 모두에 원종훈(原從勳) 1등에 녹훈(錄勳)되고, 이조참판과 가선대부(嘉善大夫)[조선 시대 종이품(從二品)의 문관과 무관에게 주던 품계]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