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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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禮煥 |
이칭/별칭 | 난국재(蘭菊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772년 - 이예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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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14년 - 이예환 용암영당 건립 |
몰년 시기/일시 | 1837년 - 이예환 사망 |
출생지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수부리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대표 관직 | 지평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보령에서 후학을 양성한 선비.
[개설]
이예환(李禮煥)[1772~1837]은 조선 후기의 선비로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과거는 보지 않았다. 고향인 남포[현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에서 후학을 기르고 풍속의 교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난국재(蘭菊齋)이다. 남포현 수암리[현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수부리]에서 태어났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이광원(李光元), 아버지는 이동욱(李東郁), 어머니는 영월 신씨 신석훈의 딸이다. 광산 김씨 김성무의 딸과 혼인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이예환은 9세에 원현(圓峴) 이상욱(李相郁)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14세에 성당(性堂) 정혁신(鄭赫臣)[1719~179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유학의 깊이가 있었으나 과거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깊어 아픈 어머니를 위해 생선을 사 직접 떠 드리고, 햅쌀을 빻아 바로 드리며 정성껏 공양하였다. 17세와 18세에 각각 모친상, 부친상을 연달아 겪으며 큰 슬픔에 빠졌으나 상례를 예에 따라 치렀다.
1813년, 42세 겨울에 탄동(炭洞)으로 이거하였다가 다시 이듬해 수암(洙岸)으로 옮겨왔다. 숙재(肅齋) 조병덕(趙秉悳)[1800~1870]과 도의로 교유하였으며, 고향인 남포 수암에서 주희(朱憙)·이제현의 사당인 용암영당(龍岩影堂)[현 심사당(三思堂)]을 세우고 ‘성당서사계(性堂書社契)’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당시 이곳을 ‘성당정사(性堂精舍)’ 라고 하였다.
1816년 봄 성당정사에서 스승인 정혁신의 유고를 정리하며 오산(烏山)[현 충청남도 보령과 홍성 사이에 있는 오서산]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1831년(순조 31) 60세에 평리(坪里)로 이거하였지만, 4년 만에 다시 수암으로 돌아와 말년을 보내다 1837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남포의 남쪽에 있는 노인동(老人洞)에 장사 지냈다.
[학문과 저술]
이예환 사후 1851년 아들 이기표(李基鑣)와 손자 이규현(李奎鉉)이 이예환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난국재집(蘭菊齋集)』을 간행하였다. 문집에 수록된 글을 통해 이학재가 송치규(宋穉圭)의 문인이면서 백사형(白師亨), 이상문(李相文), 오익양(吳益讓), 김석주(金碩柱) 등과 교유하며 성리학을 논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상훈과 추모]
고종조에 지평(持平)으로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