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12
한자 王安德
이칭/별칭 정양(貞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363년 - 왕안덕 홍건적 평정
활동 시기/일시 1374년 - 왕안덕 우왕의 옹립을 주장
활동 시기/일시 1385년 - 왕안덕 양광도도원수가 되어 왜구 토벌
활동 시기/일시 1388년 - 왕안덕 양광도도원수로 요동 정벌 참전
활동 시기/일시 1389년 - 왕안덕 왜구 토멸전에서 대패
활동 시기/일시 1390년 - 왕안덕 풍주 유배에서 풀려나 개경 밖으로 추방
몰년 시기/일시 1392년연표보기 - 왕안덕 사망
부임|활동지 활동지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지도보기
성격 무신
성별
대표 관직 6도도통사|도체찰사|판삼사사

[정의]

고려 후기 왜구가 서해안을 따라 보령 지역을 침입했을 때 전투에 참가한 무장.

[개설]

왕안덕(王安德)[?~1392]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홍건적을 평정한 공으로 2등 공신이 되었으며, 우왕(禑王)[재위 1374~1388]의 옹립을 도왔다. 요동 정벌 때에는 조민수의 휘하로 참전하였다. 충청남도 보령 남포 지역에 왜구가 침입하자 나아가 싸웠으나 패하였다.

[활동 사항]

1363년(공민왕 12) 안우(安祐) 등과 함께 홍건적을 평정한 공으로 2등 공신이 되었으며,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1374년(우왕 즉위년)에 공민왕이 사망하자 이인임(李仁任)[?~1388] 등을 도와 우왕의 옹립을 주장하여 등극하게 하였다. 이어 판사사(判司事)를 거쳐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전임되었다.

1377년 양광도도원수(楊廣道都元帥)가 되어 왜구와 싸웠으나 패전하였고, 1383년에 양광도조전원수(楊廣道助戰元帥)로 있을 때에 왜구 1천여 명이 옥주와 보령 등의 고을을 함락시키고 개태사(開泰寺)로 들어가니 왕안덕 등이 공격하여 적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숨어들었다.

1385년 다시 양광도도원수가 되어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 공으로 찬성사(贊成事)에 오르고, 1388년 요동 정벌을 할 때에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曺敏修)[1324~1390]의 휘하에서 양광도도원수로 참전하였다. 이해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昌王)[재위: 1388~1389]이 즉위하자 육도도통찰사(六道都統察使)가 되었다.

이듬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양광도 도둔곶(都屯串)[현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도둔리]에서 광주절제사(廣州節制使) 최운해(崔雲海), 양광도도절제사(楊廣道都節制使) 이승원(李承源)과 더불어 왜구 토멸에 나섰으나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찬성사(贊成事)를 제배(除拜)하였을 때 왜적이 옛 비인(庇仁)의 경계에 주둔하였으므로 왕안덕(王安德)이 광주 절제사 최운해, 양광도 도절제사 이승원과 함께 90리를 추격하여 도둔곶[都屯串]에서 싸워 크게 패하여 왕안덕은 말에서 떨어져 겨우 죽음을 면하였으나 사졸의 죽은 자가 40명이나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1389년(공양왕 1)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고, 이듬해 김저(金佇)·변안열(邊安烈)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극형에 처하라는 상소를 대간(臺諫)에서 올렸으나 왕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1390년 3월 강원군(江原君)에 봉해졌으나 대간의 계속된 탄핵으로 결국 풍주(豐州)에 유배되고, 다음 달에 풀려나왔다. 낭사(郎舍) 허응(許應) 등이 거듭 탄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위화도회군 때의 공과 죄가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로 유배를 면하고 개경 밖으로 추방되었다. 이어 개경 외의 고장에서는 어디서나 원하는 곳에 거주할 수 있는 특전이 내려졌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정양(貞襄)이며 홍건적을 평정한 공으로 2등 공신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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