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54
한자 倭寇 侵入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강종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76년 - 왜구 홍산대첩에서 최영에게 대패
전개 시기/일시 1380년연표보기 - 왜구 남포현 침입
전개 시기/일시 1381년연표보기 - 왜구 보령현 침입

[정의]

고려 말 충청도 보령 지역의 일본 해적 침입 사건.

[개설]

고려 말에 왜구의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보령 지역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보령 지역의 왜구 침입은 1380년(우왕 6) 남포현 침입과 1381년(우왕 7) 11월 보령현 침입을 들 수 있다. 1388년(우왕 14)에는 왜적 1,000여 명이 옥주(沃州)와 보령(保寧) 등의 현(縣)을 함락하는 일이 벌어졌다. 왜구의 침략으로 보령 지역은 백성이 유망(流亡)하고 농토가 황폐화되었다.

[역사적 배경]

고려는 13세기부터 왜구의 침략을 받았는데, 1350년(충정왕 2)부터는 왜구의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일본은 원(元)과의 전쟁 이후 남북조의 내란기에 접어들었으며, 남조 세력권에 있던 일부 지방 세력들이 해적화하여 한반도와 중국 연해안을 침략하였다.

[경과]

고려는 원 간섭기 이후 정치적 혼란과 군사력의 약화로 인해 왜구의 침입을 저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로 인해 14세기 중엽에는 왜구가 연안을 비롯해 내륙까지 침범하였으며, 수도인 개경 근처까지 출몰하였다. 우왕[재위: 1374~1388] 때는 재위 기간 14년 동안 378회의 침략을 받았다. 왜구는 주로 해안과 강을 따라 침략하였는데, 보령 지역도 해안에 자리하고 있어 왜구의 노략질을 피할 수 없었다.

1380년(우왕 6)에 왜구가 남포현에 침입하였으며, 1381년(우왕 7) 11월에는 보령현에 침입하였다. 1388년(우왕 14)에는 왜적 1,000여 명이 옥주(沃州)와 보령(保寧) 등의 현(縣)을 함락하고 개태사(開泰寺)로 들어와 계룡산(雞龍山)에 웅거(雄據)[일정한 지역을 차지하고 굳게 막아 지킴]하였다. 그로 인해 백성들이 유망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공양왕[재위: 1389~1392]이 새로 진성(鎭城)을 설치하여 유망민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고려 말 도만호(都萬戶) 겸 초토사(招討使) 김성우(金成雨)[1327~1392]는 보령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여 지역민을 보호하였다.

1376년 최영(崔瑩)[1316~1388]이 홍산(鴻山)[현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388년에는 왕안덕(王安德)이 도둔곶에서 왜구에게 패하였는데, 당시 보령 일대도 왜구 침입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이 보령 지역은 서해안을 끼고 있어 항시 왜구의 침입에 노출되어 있었다.

[결과]

왜구의 침략으로 고려의 개경에 계엄령이 자주 내려졌으며, 철원으로의 천도론이 대두되는 등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조세를 운반하고 보관하던 조운선(漕運船)과 조창(漕倉)의 약탈로 인해 국가 재정은 파탄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백성들의 피난과 유이(流移) 등으로 연해 지역의 농토는 황폐화되었다. 공양왕 대 이르러 새로 진성을 설치하여 유망민을 정착시켰다.

[의의와 평가]

고려 말에 연해안 지역은 빈번한 왜구로 피해를 많이 입어서 ‘연해안 수십 리의 지역에는 인가가 전혀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황폐화되었다. 왜구의 침입과 약탈은 고려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악영향을 끼쳤으며, 고려 쇠퇴의 일부 요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