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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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錫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을경 |
출생 시기/일시 | 1862년 - 김석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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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1908년 - 김석원 군자금 모집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미상 - 김석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 김석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
[정의]
구한말에 활동하였던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석원(金錫元)[1862~?]은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 출신으로 충청도 일대에서 1907년부터 1908년까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활동 사항]
1905년 을사늑약을 맺은 후 일본의 국권 침탈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 퇴위와 8월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항일의병전쟁이 격화·고조되어 가는 위급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위급한 상황을 느낀 김석원은 의병에 투신한 후 군자금 모집 활동에 집중하여 항일 투쟁 활동을 펼쳐 나갔다.
김석원은 1907년 11월부터 1908년 3월까지 오양선(吳良善) 의병 부대에 참여하여 충청남도 청양·부여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오양선의 휘하에서 박선달(朴先達) 등과 함께 의병의 이름으로 수십 명의 의병들을 모집하여 총기 등을 휴대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석원은 1907년 11월 정산군 민연산의 집에서 30원, 정산군 유원평의 집에서 10원, 정산군 광명리 조반수의 집에서 8원, 정산군 태평리 평의관 집에서 15원, 정산면 작천리 김 아무개의 집에서 5원 등의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1908년 2월에는 정산군 싸리재 조서천의 집에서 10원, 부여군 풀말 김 아무개의 집에서 10원, 정산군 꽃고개의 기타 집에서 8원 등을 군자금으로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08년 9월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